요한 바오로 2세는 20세기 교황들 중 최연소(58세) 교황으로 선출, 27년간 뛰어난 도덕적 리더십을 펼쳐나갔다. 전임 교황들에 비해 정치·사회 관련 이슈들에 관해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으며, 세계 평화에 앞장서며 공산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에도 크게 공헌했다. 젊은이들에게 끝없는 사랑을 베풀고, 인간 생명의 가치와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웠던 노력은 요한 바오로 2세 생애 전반에 걸쳐 이뤄진 헌신이었다. 손을 맞잡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는 왕성한 사목방문도 요한 바오로 2세가 실천한 대표적인 활동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살려, 인류와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직접 드러내 보인 것이다. 가톨릭 사회교리도 사실상 요한 바오로 2세가 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머리를 숙인 주인공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는 이제 요한 바오로 2세를 ‘평화의 사도’, ‘위대한 휴머니스트’를 넘어서 ‘성인 교황’으로 기록한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히십시오.”
1978년 10월 16일, 요한 바오로 2세는 두 손을 내밀며 세상 속으로 힘차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 평화의 선교사
전 세계인들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류의 평화와 연대를 강조했던 요한 바오로 2세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한다.
20세기 들어 지구촌에서는 단 하루도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쳤지만 공산주의로 인한 동서간 장벽은 갈수록 높아졌다.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요한 23세와 마찬가지로 ‘현대교회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늘 숙고했다. 우선 스스로가 먼저 교회와 세상을 부지런히 오가며 소통의 모범을 보였다. 신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으로 사목방문과 순례를 택했다. 그는 재임 기간, 104회에 걸쳐 129개국을 방문했다. 연간 평균 4회에 걸쳐 해외순방을 다녔다는 말이다. 이동한 총거리는 지구 전체를 29회를 돌아온 거리와 맞먹는다. 이러한 활동은 전 세계 가톨릭선교를 활성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바탕으로 해, 세계인들은 그에게 ‘선교사 교황’이라는 수식어도 붙여줬다. 그가 펼친 해외순방은 세계교회의 중심을 서방에서 동방으로,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이동시키는 역할도 했다.
“지구의 어느 곳에서도, 인간 역사 어느 부분에서도 그리스도가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 아래 있는 조국 폴란드를 방문하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반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당시에는 중국과 베트남, 러시아의 문턱을 넘진 못했다.
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의 힘찬 행보는 동서간 장벽을 무너뜨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 그 체제를 포기하게 만드는데 힘을 실었다. 구소련 해체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도 “최근 몇 년 동안 동유럽에서 일어난 일들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는 세계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할 줄 알았다”고 밝힌 바 있다.
■ 제삼천년기 복음화를 향해
2000년 대희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바티칸 성문을 열었다. 가톨릭교회만의 축제로 지내오던 희년이 그리스도교 일치와 세계를 향한 만남의 장으로 새롭게 열리는 순간이었다.
▲ 요한 바오로 2세가 2000년 대희년을 맞아 교회의 지난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원하고 있다. 【CNS】
▲ 유다교, 이슬람교 지도자와 만남을 갖고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CNS】
이렇듯 역사적인 참회예절과 희년 순례에 이어 가톨릭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교회 일치 기념제 등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 제삼천년기 복음화를 준비한 덕분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폴란드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은 그에게 “새로운 교황의 임무는 교회를 제삼천년기로 인도하는 일일 겁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랜 기간 제삼천년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이에 앞서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1994)도 발표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단계별로 설명한 교서였다. 그는 이 교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는 항상 영원하신 분”임을 재차 밝히고 이어 희년의 의미와 실천사항 등을 신학적·사목적 차원 등에서 제시했다.
■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가르침
▲ 요한 바오로 2세 시복식에서 베네딕토 16세가 참배하고 있다. 【CNS】
그의 사목문서 전반의 신학적 사상을 살펴보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과 문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회문제와 관련한 가르침은 첫 회칙인 ‘인간의 구원자’(1979)에 이어 ‘자비로우신 하느님’(1980), ‘진리의 광채’(1993)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됐다. ‘노동하는 인간’(1981), ‘사회적 관심’(1987), ‘백주년’(1991) 등을 통해서는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고 노동하는 인간들과의 연대를 제공했다. 실제 험난한 노동현장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나는 착취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말하고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 국가는 강도떼에 불과하다”며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고해왔다. 2000년대 이후에는 세계화의 흐름을 강력히 비판, “세계화로 식민화가 재등장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회칙 ‘생명의 복음’(1995), 사도적 서한 ‘여성의 존엄’(1988), 자의교서 ‘생명의 신비’(1994), 사도적 권고 ‘가정공동체’(1981), ‘가정 교서’(1994) 등을 통해서는 인간 생명과 존엄성의 가치 등을 강조하고 이와 관련한 각종 윤리적 문제들과 실천 방안 등을 제시했다. 또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 몸의 존엄성과 성에 관한 가르침을 밝힌 ‘몸 신학’을 정립,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인간 안에서 사람과 사랑, 성의 가치를 적극 인식할 수 있도록 이끈 공로도 관심을 모은다.
이렇듯 요한 바오로 2세는 역동적인 행동으로써는 물론, 수많은 문서들을 통해 교회 안팎에 그리스도교 인본주의를 확산하는데 힘을 실어왔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결같이 외쳐왔다.
“일어나 갑시다. 그리스도를 믿고 갑시다. 그분은 당신만이 아시는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더불어 길을 걸어가실 것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회고록 ‘일어나 갑시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