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13세(재위 1878~1903년)의 1897년 회칙 ‘신적 책무’도 어느 정도 성령에 관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은총론적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1979년의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가 성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1980년의 두 번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성부에 관해 고찰한다면, 이제 1986년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통해 성령에 관한 성찰을 제시함으로써,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한 삼위일체론적 묵상의 완결이 이루어진다.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에 나오는 신학적 주제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계승’, ‘창조와 육화의 단일성에 관한 성령론적 전망’, ‘세상의 죄(罪)를 드러내시는 성령’,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성령론적 성찰’의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 중심 주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공통된 특징은, 그 성령론적 성찰이 기존의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관점을 보완하여 이루어지면서 궁극적으로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 차원의 묵상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계승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은 기본적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계승’이라는 맥락에서 발표되었다. 그 서문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문헌의 역사적 배경으로 레오 13세의 1897년 회칙 ‘신적 책무’와 비오 12세(재위 1939~1958년)의 1943년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i Corporis Christi)를 언급한다.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교회의 영혼’이며 ‘생명의 원리’인 성령께서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교회 안에서 활동하신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특별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부터 고조된 성령론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다. 교황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년)의 진술을 인용하여, 공의회의 가르침은 성령론의 계발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근에 와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령께 대한 교리에 새로운 관심이 요청됨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의회의 그리스도론, 특히 그 교회론에 이어 성령께 대한 새로운 연구와 신심이 계발되어야 하겠습니다. 공의회의 가르침을 보완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2항)
그런데 여기에서 강조하는 성령론의 계발 촉구는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신비로의 복귀를 지향한다. 사실, 삼위일체론적 차원의 회복이야말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남긴 가장 핵심적 과제이다.
“이 회칙은 지난 공의회가 남겨 준 유산의 가장 중요한 원천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상, 교회 자체와 세상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관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전해 주는 문서들은 복음서, 교부학, 전례학 등의 연구를 통해 하느님의 성삼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우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성삼 신비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라는 정식으로 흔히 표현됩니다.”(2항)
이는 ‘교회 내부의 차원’,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 차원’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교회 문제를 다룬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그 논의의 결과로 발표한 문헌에서 삼위일체론적 차원의 회복과 심화를 요구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공의회 이후에 필연적으로 성령에 대한 회칙이 나오게 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듯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성령론적으로 계승해야 한다는 취지 설명에 뒤이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기본 정신과 성과를 성령론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우리는 모두 그 공의회가 특별히 ‘교회론적’ 공의회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교회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한 공의회였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 공의회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성령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영혼’인 성령에 관한 진리로 물들여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세사의 현 단계에 대해서 ‘성령께서 교회에 말씀하시는 모든 것’(묵시 2,29 3,6.13.22 참조)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그 풍부한 가르침 안에 틀림없이 보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공의회는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고 그와 함께 증언하면서 성령-파라클레토스의 현존을 특별히 강하게 확인시켰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이 공의회가 어려움을 많이 안고 있는 우리 시대에 성령을 새로이 ‘현존’하게 하였습니다.”(26항)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안을 향한 교회’와 ‘밖을 향한 교회’라는 기본 노선을 따라 개최된 교회론적 공의회인데, 여기에 성령론적 차원 또한 연결되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친교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교회를 온전한 진리에로 인도하며(요한 8,31-32 16,13 참조) 그 구원 활동을 주관하시는 성령이라는 점에서, 공의회의 교회론적 관심은 필연적으로 성령론적 전망에로 발전될 수밖에 없었고,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공의회의 기여와 공헌인 것이다.
▲ 성 베드로 대성당 내 ‘베드로의 성좌’ 위 대리석 벽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은 ‘성령’에 관해 본격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헌이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창조·육화 단일성에 관한 성령론적 전망
‘생명을 주시는 주님’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바로 ‘창조와 육화의 단일성에 관한 강조’이다. 창조와 육화의 연속성과 단일성은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 안에서 발견한다. 이 회칙의 제3부에서는 2000년 대희년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사건이기에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론적인 특성”을 지니지만, 그와 동시에 “성령론적 특성”도 지니고 있음을 설명한다. 강생의 신비는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 “성령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강생의 신비는 위격-사랑이시며, 창조되지 않은 선물이시요, 창조계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물의 영원한 원천이며, 은총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건네주실 때 그 행위의 직접적 원리이시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 주체이신 분, 그런 성령의 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건네주시는 그 자기 증여, 그 선사 행위의 극치가 강생 신비입니다. 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은 창조와 구원의 역사 전체에서 성령께서 이룩하신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대희년 경축 사건은 이 업적을 기억할 것이며, 우리가 그 의미를 더 깊이 탐구한다면, 이 업적을 수행해 내신 주인공인 성령의 위격도 같이 기억할 것입니다.”(50항)
여기에서는 성령을 통한 ‘창조와 육화의 단일성’을 강조하며,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를 성령에 의한 하느님 자기 전달 역사의 정점으로 해석한다. 이렇듯 하느님 자기 전달의 원리이자 주체로서 제시된 성령에 대한 해석은 자연스럽게 구원 역사 전반에 걸친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활동’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에로 연결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이루어지는 성령의 구원적 활동을 설명한다.
“실상, 이 모든 곳, 모든 시대를 망라하고, 모든 사람 안에서까지 구원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이 활동은 진행되었으며, 이 영원한 구원 계획 안에서 성령의 활동은 강생의 신비와 구속의 신비에 긴밀하게 연결되었습니다.”(53항)
그리고 같은 53항을 통해, 성령께서는 교회의 가시적 경계를 넘어서도 신비로이 활동하심을 말한다.
“우리는 더 긴 안목을 가지고, ‘더 멀리까지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의 대화 중에 인용하셨던 표상대로,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요한 3,8 참조)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주로 교회를 중심 주제로 해서 모였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령께서 교회의 보이는 몸 ‘밖’에서도 활동하심을 상기시켰습니다.”
이어서 54항에서는 지금까지 창조론, 구원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은총론 등 전반에 걸쳐서 이루어졌던 모든 신학적 논의를 삼위일체론의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결론짓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 역사 안에 은총이 ‘나타나는 일’은 성령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이 성령께서는 세상 안에서 이룩하시는 하느님의 모든 구원 활동의 원리이시며, ‘숨어 계신 하느님’(이사 45,15 참조)이신데, 이분께서는 또 사랑과 선물로서 ‘온 세상에 충만’(지혜 1,7 참조)하십니다.”
이러한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의 신비가 이 회칙의 가장 원천적인 신학적 기반인 것이다. 이 회칙에서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을 연결시키는 것은 바로 “구원의 경륜 속에서 성령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내밀한 끈으로 이어진 관계”(7항)가 있음에 대한 확신이며, 동시에 그 “신적이고 삼위적인 원천의 단일성”(7항)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현재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통해서 성취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이제 교회의 기억 안에서 되살아나 현존하게 되는 것 역시 성령을 통해서인 것이다(51항 참조).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박준양 신부는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