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죄를 드러내시는 성령
‘죄를 드러내시는 성령’이란 신학적 개념은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요한 16,7-8 참조)에 근거한다. 그런데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에서는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가 “세상의 유죄성(有罪性)을 들어 밝힌다”로 해석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27항 참조). 이 회칙은 성령께서 죄를 드러내심은, 먼저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날에, 골고타의 죄에 대해서, 무고한 어린 양의 죽음에 대해서, ‘세상’의 유죄성(有罪性)을 들어 밝히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인간 역사의 어떤 시기에 어떤 장소에서 저질러진 것이라도, 모든 죄에 대해서 같은 역할을 하시어 세상의 유죄성을 밝히십니다. 유죄성을 밝힌다는 말은 죄라고 하는 악을, 어떤 악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해서 보여 주는 것을 뜻합니다. 죄는 그것이 숨겨 간직하고 있는 악의 신비(2테살 2,7 참조)로 해서 자기 고유한 악의 모든 차원을 다 가진 채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나서는 인간이 죄의 이런 차원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32항)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맺는 관계 안에서 죄의 실체가 드러나게 됨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나는 죄의 정체란 무엇인가? 이를 창세기(1-3장 참조)와 바오로 서간의 증언에 근거하여 순종과 불순종의 대비로 설명한다.
“성 바오로께서 첫 아담의 ‘불순종’에 대응하여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치시켜 놓은 것도 그런 뜻에서였습니다. ‘죽음에까지 이르는 순종’(참조 : 로마 5,19 필리 2,8)을 그리스도께서는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한 처음에 관한 증언에 따르면, 원초적 실재 그대로의 죄는 인간의 의지 - 그리고 양심 - 안에서 ‘불순종’, 곧 하느님의 의지를 거슬러 인간이 자기의 의지를 내세우는 일로 이루어집니다. 이 원초적 불순종은 하나의 거절 행위를 전제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전제합니다.”(33항)
여기서는 그리스도 십자가와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죄의 실체와 정체를 원죄에 관한 성찰을 통해서 밝힌다. 즉, 모든 인간적 죄의 근원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진리를 근본적으로 거부함이라는 사실을, 아담의 불순종과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비시키며 보여준다. 결국, 죄의 본질과 정체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의 의지, 하느님의 구원적 의지를 거슬러서 하는 의지적 행위”(39항)인 것이다.
성령께서 죄를 드러내신다는 것이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 십자가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 근원에 있는 악의 실재, 즉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거부와 불순종을 밝혀내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성령께서 죄악의 고통을 구원적 사랑으로 바꾸어 주심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근원적이고도 궁극적인 차원의 성찰은 인간의 죄 때문에 고통 받으시는 하느님에 대한 묵상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느님의 깊은 속을 헤아리지 않고서는’ 죄가 지니고 있는 악의 참혹한 실체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죄를 들어 밝힌다’는 말이 고통을 계시한다는 뜻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성경이 의인법적으로 생각하여 죄가 ‘하느님의 깊은 속’에 끼친 것으로 묘사하는, 어떤 의미로는 성삼의 마음속 깊이에 있는 그 형용할 길 없는 고통을 계시한다는 뜻도 같이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교회는 계시로부터 빛을 받아서, 죄란 하느님께 끼쳐 드린 모욕이라고 믿고 선언합니다.”(39항)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고통, 그리고 그로 인한 강생의 신비에 관한 성찰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죄를 밝히시는 분일뿐 아니라 곧 그 죄를 넘어서는 구속적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곧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39항)이시기 때문이다. 즉,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표출되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이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길 없는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구속적 사랑의 경륜이 탄생하도록 촉진했습니다. 하느님에게, 사랑이신 성령께서는 인간의 죄를 생각할 때 그것이 구원적 사랑을 더욱 풍성히 베풀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하는 일치 속에서, 성령께서는 구원의 경륜을 일으키시어 인간의 역사를 구속의 선물들로 채워 주십니다. 성령께 ‘죄를 들어 밝힌다’는 일은 ‘헛된 일에 묶여 있는’ 창조계와 특히 인간의 가장 깊은 양심 앞에서, 하느님의 어린 양에 의해 죄는 정복되었음을 밝혀 주는 일을 의미합니다.”(39항)
이 대목은, 죄에 대한 성령론적 성찰이 최종적으로는 삼위일체적 차원의 구원경륜에로 귀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성부의 고통과 성자의 강생이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그러한 신적 사랑의 위격적 표출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삼위일체적 구원경륜 안에서 인간의 죄가 밝혀지고 극복된다는 것이 바로 그 핵심 요점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죄를 드러내시는 성령께서는 바로 “성삼적 선물이며,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내리시는 사랑의 원천”(39항)인 것이다.
▲ 지난해 6월 부산 남천성당서 열린 부산교구 성령쇄신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성령의 은혜를 간구하며 기도를 바치고 있다. 인간은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맺게 되는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 존재의 참다운 자유와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성령론적 성찰
‘생명을 주시는 주님’에는 또한 탁월한 인간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그 요지는, 인간은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맺게 되는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 존재의 참다운 자유와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성령을 통해서만 인간의 죄가 근원적으로 드러나고 사해진다는 인간학적-성령론적 성찰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망이다.
“인간은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인간성을 제대로 파악하게 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모습이고 그분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존재이지만, 그 사실이 그제야 제대로 파악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에 관한 이 진리는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거울삼아, 이를 끊임없이 새로 발견해야 합니다. 인간은 이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배우고, 그분께서 주신 성령을 통해 이를 각자의 삶에서 실현합니다.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서는 자체로서는 위격 상호 간의 선물이라는 초월적 실재로서 존재하시고, 성령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선물로 건네주심으로써 인간 세상을 안으로부터 변화시키십니다.”(59항)
이는 인간 존재에 관한 성령론적 성찰을 제시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세 1,27) 창조되었지만, 그러한 자기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과 맺게 되는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발터 카스퍼(Walter Kasper, 1933-) 추기경은 명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연약한 인간을 도우러 오시는 하느님의 영에 자신을 개방하는 경우에만 우리가 인간 현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여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445쪽 참조). 즉,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며,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근원적 존엄성을 발견하게 되며, 이를 각 개인의 삶 안에서 진정한 자유로 실현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학적-성령론적 성찰은 종국에 가서 삼위일체론의 차원에로 수렴된다. 즉,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관한 전망을 삼위일체 신학의 주요 원리들을 통해서 설명한다. 위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느님께서는 자체로서는 위격 상호 간의 선물이라는 초월적 실재로서 존재하시고”라는 문장을 통해 ‘내재적 삼위일체’의 차원에서 하느님의 세 위격들 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내재성’의 신비를 설명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선물로 건네주심으로써 인간 세상을 안으로부터 변화시키심”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위격적 특징인 성화(聖化)의 활동을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통한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 발견’이란 주제를 삼위일체론 차원에서 근원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은 인간과 세상 안에 신비로이 현존하시며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처럼 성령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과 구원 역사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갖게 될 것이다.
박준양 신부는 1992년 사제로 서품,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전공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박준양 신부는 신학과사상학회 편집위원장 및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 FABC 신학위원회 전문신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