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교회의 마리아론으로 일컬을 수 있는 회칙에서 교회의 성격이 온전히 드러났다면 그 근간이 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964), 바오로 6세 교황의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 1974)과 더불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성모님을 향한 지극한 공경심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신학적 배경을 되돌아봄으로써 회칙의 사목적 지향을 보다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회칙의 구성과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나아가 회칙의 신학적 해석을 기반으로 마리아 공경의 방향과 성격을 반성함으로써 살아있는 신앙전통의 맥을 올바로 이어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I. 회칙의 역사적·신학적 배경
1. 구원의 신비 안에 계시는 처녀이신 어머니 마리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964) 제8장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응답하고 그리스도의 탄생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공경하고, 교회 안에서 그 구원의 신비가 이어짐으로 교회의 전형이고 모범이며,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의 어머니이심을 밝히고 공경할 분임을 알린다(52~53). 즉, 공의회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그리스도 구원의 신비가 모든 피조물들 안에서 드러나듯이 구원의 종속적 임무를 가지신 마리아를 모든 피조물들과 교회에 완덕의 모범을 보이시는 분으로 드러낸다(62). 그러므로 교회는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서 복음선포와 세례를 통하여 성령으로 잉태한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들을 낳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며(64), 그때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태어나시고 자라나실 것이다. 즉, 교회는 자신의 사도직 사명 안에서 마리아의 모범을 실천하는 것이다(65).
그런데 복되신 동정녀이신 마리아를 공경하는 태도는 강생하신 말씀과 성부, 성령에게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 공경의 표현은 성자께서 바르게 이해되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는 한계 안에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함이 인정될 수 있다(66). 즉, 교회는 완벽한 교리를 제시하지 않고 신학적 견해에 관해 열린 자세를 보이지만(54), 성모신심은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향한 자녀다운 사랑으로서 전례적 공경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그 표현이 참된 교리에 대해 오해로 이끌 수 있는 것은 힘써 막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참된 신심은 참된 신앙에서만 우러날 수 있으며 그분의 덕행을 본받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67). 나아가 마리아는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희망과 위로의 표지로서 모든 성인들의 통공과 함께 당신의 기도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일치로 이끄는 어머니인 것을 다시 확인하였다(69).
▲ 바티칸의 교황 경당 내부 모자이크 ‘구세주 어머니’(Marco Rupnic, sj·1999). 승천하는 그리스도 아래에서 성모 마리아와 제자들이 성령강림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
2.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마리아 공경
로마교회의 전례를 개혁하고 마리아 신심의 올바른 방향을 가르친 바오로 6세 교황의 권고,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 1974)에서는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협력한 마리아를 교회의 모범으로 공경하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과 분리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4), 마리아가 차지하는 개별적이고 특별한 위치가 언제나 그리스도 구원사건들의 축일들과 함께 드러남을 강조한다(5~8). 즉, 마리아는 깨어있는 동정녀로서 하느님의 구원약속을 받아들였으며(루카 1,38), 예수 그리스도의 유년기를 마음에 간직하여(루카 2,19.51) 교회에 유산으로 전해준 유일한 증인이시다(17). 따라서 교회는 마리아의 일생이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교회의 전례 안에서 기억한다(23). 마리아는 성령으로 형성된 새로운 피조물이며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와 교회의 탄생에 기여한 분으로서 삼위일체의 관계 안에서 탁월하신 분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탄생시키는데 어머니로서 교회와 협력하시는 분이다(28). 즉, 교회는 마리아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으며 그분의 모성으로 새로운 영적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에게 드리는 사랑은 성서를 바탕으로 전례와 신심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사목적인 기준을 가지고 그 형태를 쇄신할 필요가 있으며, 신심행위는 지역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전례에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31). 또한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그분의 영적 모성에 대한 공경이며, 궁극적으로 구세주이며 유일한 중재자, 교회 일치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향한다(32~33). 특별히 현대세계의 변화와 학문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학의 차원에서도 마리아의 모범이 새롭게 수용되고 신심의 가치가 올바로 평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32~35). 왜냐하면 마리아는 당신의 아들에게만 배타적인 사랑을 쏟으신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도 공동체의 믿음을 북돋우시고(요한 2,1-12) 현대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며, 억눌린 이들을 해방시키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정의와 애덕의 옹호자인 동시에 사랑의 활기로 천상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의 증인이기 때문이다(37).
바오로 6세 교황은 마리아 신심과 연관하여 삼종기도가 하느님 아들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를 회상하도록 돕는 불변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41), 로사리오(묵주기도)가 복음적 기도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사도적 헌신을 키워주는 고유한 효력이 있음을 특별히 강조하였다(42~48). 또한 마리아 신심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복음적 덕행의 모델로 빛나는 마리아를 바라보고 따름으로써 하느님과 우정과 친교를 맺으며 성령이 함께 하시는 내적 은총의 상태를 누리는 것이므로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끈 마리아를(요한 2,5) 공경하는 것은 전례에서 마리아의 목소리와 결합하여 주님께 위안, 확신, 희망, 기쁨을 드리는 사목적·신학적 가치를 드러내며, 교회와 사회에 유익이 되도록 기꺼이 투신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57~58).
3.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자녀다운 공경과 마리아신학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된 폴란드의 카롤 보이티와(1920~2005)는 아홉 살이 되던 1929년, 심장병을 앓던 어머니 에밀리아를 잃고 성모님을 자신의 어머니로 의지하며 성장하였다. 그의 교황문장에서 볼 수 있는 대문자 ‘M’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서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상징하며, 인간의 구원에 결정적으로 참여하는 성모님의 중재를 드러낸다. 크라코비아의 추기경 시절부터 사용하던 문장인 ‘TOTUS TUUS’(모든 것은 당신의 것) 역시 그의 조국 폴란드의 성지 체스토호바의 야스나 고라 수도원의 검은 성모님께 드린 공경에서 비롯되어 성모님께 온전히 의지했던 교황 자신과 교회의 전적인 헌신을 상징한다.
교황이 된 후에는 파티마와 과달루페 등 여러 성모성지를 방문하고, 2000년 희년에는 바티칸의 교황 집무실 옆의 경당을 현대식 이콘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구세주 어머니’ 성당으로 봉헌하였으며, 2002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를 묵주기도(로사리오)의 해로 선포하고 교서 ‘동정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 2002)에서 묵주기도에 그리스도 생애의 다섯 가지 중요한 순간들을 마리아와 함께 기억하는 ‘빛의 신비’를 더하였다.
이는 예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기억함으로써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경륜을 분명히 하며, 묵주기도를 통하여 마리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여러 사건들을 묵상하며 인간의 진리와 함께 구원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최우혁(미리암) 박사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로마 교황청 대학 테레시아눔에서 영성신학 석사, 마리아눔에서 마리아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와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서 강의를 맡고 있으며,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소속 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