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 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윤지충,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 사건은 조선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충격이었다.
조선의 양반 가문에서 조상숭배는 유달리 강조하고 집요하게 지켜 나가는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조상은 자손을 위하고 자손은 조상을 위하는 것이 생명임을 강조하고, 그것의 실천이 제사라고 여겼다. 특히,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이러한 경향이 강조됐다.
조선사회에서는 명문사족으로 남길 바라며, 학문을 통해 과거에 합격하거나 혼인관계를 잘 맺고자 노력했다.
마테오 리치는 적응주의 입장에서 선교하며 조상 제사를 인정했지만, 당시 교황청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를 미신행위로 받아들이면서 100여 년간 교회 내 의례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은 1742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1715년 발표된 중국의례를 금하는 칙령(Ex illa die)을 재확인하며, 제사 금지령을 확립하는 칙서를 반포하며 종결됐다.
성직자 파견 요청을 하던 조선교회 지도부는 1790년 9월 청나라 건륭제(1735~1795)의 80회 탄신 축하 행사를 맞아 윤유일을 이승훈의 서한과 함께 다시 북경으로 파견했다. 이때 ‘미신과 조상숭배와 그 밖의 몇 가지 어려운 점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구두로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훈 서한에 대한 구베아 주교의 답장은 신부 파견을 약속하며, 조상 제사를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구베아 주교의 조상제사에 대한 단호한 금지령은 1790년 10월 북경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온 윤유일을 통해 조선교회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해남 윤씨가에서 학문으로 인정받았던 윤지충은 고종사촌 형인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과 학문적 교류를 했을 것이며 사상적인 소통도 있었을 것이다. 1784년 4월 보름날 남한강 선상에서 이벽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천주교에 매료돼 이벽을 따라 「천주실의」, 「칠극」을 연구하고 스스로 터득했다. 부족한 교리는 정약전에게 지도받은 뒤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모시고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권상연은 대대로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성리학자 집안 사람이었다.
조상 제사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개인이 신앙의 ‘양심’에 눈 뜨게 됐기 때문이다. 유교 전통 의례와 천주교 교리 사이의 차이를 스스로 깨닫게 됐으며, 천주교 신앙을 자신의 최우선 가치로 받아들였던 이들이 폐제분주를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교회의 명령 내지 방침이기에 그렇게 따르기는 어려운 문제이며, 제사금지령 이전에 유교 의례의 의미와 형식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유교적 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품었고, 천주교를 진리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행동인 것이다.
이같은 신앙적 이해와 단행, 그에 따른 박해는 세계교회와 조선교회에 두루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종교사와 종교문화에도 영향을 줬다. 두 순교자를 비롯한 당시의 믿음과 열정은 천주교와 유교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천주교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며 순교의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