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도에 밀양에서 터졌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당시에 보았던 TV 뉴스 장면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다. 집단으로 경찰서에 잡혀온 남학생들이 모두들 후드 재킷으로 얼굴을 가린 채 구석에 앉아있었고 바로 그 옆의 책상에서 모자이크로 처리된 피해 여학생의 증언이 변조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얼마나 끔찍한 광경이었던지! 이렇게 무방비로 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의 그 후 이야기도 상당히 충격적이다. 가해 남학생들의 부모들이 자기 자식만은 살려내겠다며 여학생을 회유 협박했고 그 부모에게 돈까지 써가면서 사태를 유야무야 만들었으며 결국 피해 여학생만 아무런 방어막 없이 사회에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제가 도망쳐야 되는 거죠?” 영화 <한공주>(이수진 감독, 극영화, 한국, 2013년, 112분)의 마지막 부분에서 공주(천우희)가 항의하며 내뱉은 말이다. 정말 왜 잘못한 것도 없는 공주가 피해 다녀야만 할까? 영화 시작에 전철을 탄 공주가 서울에서 인천으로 빠져나갈 때 한강철도의 주변 풍경이 잔잔하게 지나쳐가는 장면이 나온다. 강물이 무심하게 흘렀던가? 하지만 이때까진 그렇게 무심히 흐르는 강물이 공주의 맘에 어떤 풍랑을 일으켰는지 알기에 관객의 상상력은 충분치 않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왜 공주가 25미터 거리의 수영 연습에 집착했는지, 왜 친구 중 하나가 “25미터를 가봐야 벽이잖아” 하면서 공주의 집착을 비아냥거렸는지, 왜 친구였던 화옥(김소영)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심한 강물이 더 이상 무심해보이지 않는 순간이었다. 감독의 복선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공주는 주변의 시선에서 완전히 안전치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줄을 잡고 있는 어른들에게 기대야만 했다. 그런데 비극적인 대목은 어른들 중 누구 하나도 공주의 생명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아마 공주에게 그런 끔직한 일이 없었다면 어른들은 그녀에게 훨씬 관대한 입장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자세한 내용을 안 이상, 깊이 관여했다간 자칫 자신도 다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공주를 밀어내고 말았다. 공주에게 마지막까지 호의적이었던 친구 은희(정인선)와 조여사(이영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수진 감독은 적절한 장면과 인물 대비와 시점혼합(時點混合)을 통해 주제를 쉴 새 없이 부각시켰고 이야기를 늘어짐 없게 이끌어갔다. 신인 감독치곤 상당한 연출력을 과시한 셈이다.
한공주의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다. 영화에서는 아무데서도 소리 낼 수 없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공주의 현실을 고발한다. 하느님은 약자가 소곤거리는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는, 귀가 아주 밝으신 분이다. 그러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이 영화를 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야 한공주가 숨이라도 좀 쉬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강하게 추천한다.
박태식 신부는 서강대 영문과와 종교학과 대학원을 졸업 후 독일 괴팅엔대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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