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때보다 큰 혼란과 함께 숱한 논란거리를 안겨준 선거 후유증으로 흐트러졌던 일상이 다져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선거라는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이념과 세대 간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남긴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가온 6·4 지방선거는 초유의 ‘세월호 참사’와 맞물리면서 교회 외적으로는 시민의식 성숙의 시금석이, 교회 내적으로는 사회복음화 의식을 제고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전망이다.
다양한 사회현상들, 특히 정치적 화두를 던져주는 사안들에는 그만큼 많은 의견과 입장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는 이러한 생각의 차이를 공동체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여기기보다는 차별과 배제의 지렛대로 삼아왔다는 점이다. 공동체성과 형제애를 밑불로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자신의 성향이나 생각과 다른 목소리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데 익숙해져 있는 게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눈앞으로 다가온 6·4 지방선거를 계기로 선거를 비롯한 사회 참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를 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세상 속의 교회,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천명해오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바오로 6세 교황은 1967년 정의평화위원회를 설립해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증진하는 것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중요한 봉사이자 의무임을 분명히 했다. 교회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펼치는 다양한 모색과 실천들은 어떠한 정치적 성향이나 방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고 그것을 살아가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대의 징표를 바라보며 성숙하지 못한 세상으로 인해 나타나는 비인간적 모습, 비민주적 행태 등을 그 누구보다 매서운 눈초리로 살펴왔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잣대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침해 받는 현장으로 깊숙이 들어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연유에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과 같은 신앙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유에 관심을 가지고 소통을 통해 더 큰 가치를 찾아나가는데 힘을 기울이기보다, 일방적인 야유와 질타가 난무하고 있다. 이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왜’라는 물음이 사라진 자리를 또 다른 이념으로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불일치로 인한 불편함이나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형제라는 울타리에서 내치는데 더욱 열을 올리고 있는 현실이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세상 속에서 제대로 펼쳐나가는 것이다. 이 때 하느님 뜻의 기준이 되는 것이 공동선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선을 바탕으로 세상 속을 헤쳐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나침반이 바로 사회교리다.
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해 “사적 이익이나 이념적 목적을 위하여 국가 체제를 점령하고 폐쇄된 지배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도와주면 안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406항)고 가르친다. 나아가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 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 국민들은 양심에 비추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 399항)고 밝히고 있다. 한 마디로 사적 이익에 눈이 쏠려 불의를 일삼는 권력에 저항하고 참다운 공동선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교리가 분명히 교회가 가르치는 ‘지킬 계명’임에도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찾아보기 힘든 게 우리 교회의 문제로 지적된다.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박동호 신부는 “2000년 전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머무셨던 곳은 거룩한 성전이나 회당이 아니라 세상 속이었으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였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면서 “참된 민주주의는 규범을 형식적으로 준수한 결과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엄, 인권존중, 공동선에 대한 투신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인식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선거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선거가 사회복음화를 이루는 중요한 정치행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정치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 “국민들이 인간의 권리를 참되게 행사하고 그에 상응하는 의무들을 온전하게 이행할 수 있는 인간적 환경을 조성해 주고자 노력함으로써 공동선을 추구한다”(〃 389항)고 강조하고 있다.
■ 특별 기고 - 한만삼 신부(수원교구 기산본당 주임)
공동선 지향하는 후보 선출해야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은 권력의 원천입니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자신을 다스릴 이를 선택합니다. 그 ‘다스림’의 자리를 두고 후보자들은 자신이 국민을 위한 ‘봉사’의 적임자라며 자신을 선택하면 이러저러한 일을 이루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철이 되면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들의 얼굴과 이름이 걸린 현수막에 당혹해 합니다. 마치 몇 장의 사진을 놓고 중매결혼을 강요당하듯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막상 당선된 후 약속이 뒤바뀌거나 취소돼 거짓말이 돼도 책임이 없는 나라에서 선거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묻게 됩니다. 선거는 자신의 기호나 이익을 위한 기득권과 정당을 위해 표를 몰아주는 다수의 힘겨루기나 파벌 싸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거는 위정자들이 ‘공동선’을 위해 올바로 다스리도록 참여하는 신앙의 선택이 되어야 합니다.
선거로 누가 당선되어도 결국 비슷비슷한 부정과 비리의 악순환이니 하나마나라며 포기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이며 의무를 방기하는 더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당선자는 우리 사회와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책과 돈을 사용할 수 있는 ‘결정권’을 쥐고 있습니다. 선거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자칫하면 그들의 좋지 않은 결정에 지배당하는 필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물의 관상(?)이나 인맥, 지역감정이나 자랑하는 경력이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다스리려 하는지 그가 선택할 결정의 ‘방향성’을 보아야 합니다. 그의 방향성이 그리스도인들이 찾는 가치와 같은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 회칙 ‘복음의 기쁨’(180항)에서 강조합니다. “복음이 제안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다스리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 형제애, 정의, 평화, 존엄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선포와 삶은 사회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 나라를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다스림의 자리를 갈망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다스림을 찾는 이들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이들이 물질이나 편향된 이념논쟁이나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탐욕을 공약으로 내세운다면, 그는 피조물의 가치와 척도로 세상을 다스리려는 이들입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우리의 생활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정책을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형제애에 기반을 두고 불의에 대항하는 정의를 향하며 갈등과 긴장이 아닌 평화를 건설해 나아가고 약자들이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 헌신할 이들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의 눈’으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통찰해 단순한 사건의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드러난 시대의 현실과 모순을 진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국가 정보기관이 대선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향후 선거의 공정성과 투명성, 안전은 보장되지 못한 채 기득권과 정권으로부터 방관과 침묵으로 유기되고 말았습니다. 검찰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발언과 조작 가능한 녹취를 증거로 특정 정당과 국회의원을 국가내란 음모자로 몰아세웠고, 국가정보기관이 위조한 문서를 근거로 민간인을 간첩으로 내몰았으며, 정체불명의 무인기가 발견되자 북한이 보냈다며 아우성을 칠 때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선장과 선원은 자신들을 믿고 탑승한 승객인 단원고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하며 민간인 복장으로 탈출해 해경에 구출되었고 해경은 침몰하는 배속에서 유리창을 두들기며 살려달라는 학생들의 구조를 사실상 방치했습니다. 뒤집혀 침몰하는 세월호에 갇혀있던 무고한 300여 생명의 죽음과 정부의 무능에 국민은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고, 지상최대의 구조활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언론의 거짓말에 유가족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학살로 희생된 아이들의 절규를 잊거나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슬픔이라는 좌절과 침묵에 맴돌지 말고 의연히 일어서야 합니다. 탐욕의 시대를 떠도는 ‘거짓’이라는 거대한 먹구름이 진실을 감추고 왜곡할 때 신앙인은 양심의 빛으로 진실과 정의에 눈을 떠야 합니다. 억눌린 이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비의 복음과 인간 사랑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정의를 요구하는 울부짖음을 듣고 있으며, 온 힘을 다 기울여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고자’(자유의 전갈, 1항)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