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각장애 1급 박경숙·김연숙씨
▲ 절두산성지를 찾은 네 사람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우일씨(뒷줄)와 박차이·박경숙·김연숙(앞줄 오른쪽부터)씨.
봉사자 손 잡고 대중교통으로 전국 순례
눈대신 몸으로 느낀 111곳 … 완주 후 눈물
‘가능할까?’
떨쳐내고픈 물음이 수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슴이 먼저 답했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어요. 주님, 함께해 주실 거죠?”
시각장애 1급인 박경숙(루치아·58·서울 신정동본당), 김연숙(프란체스카·60·서울 성라파엘사랑결준본당)씨에게 성지순례는 오래도록 가슴에만 품어온 꿈이었다.
지난 4월 25일, 제주교구 황사평성지를 끝으로 성지순례 안내 책자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성지순례사목소위원회 발간)에 나와 있는 전국 111곳의 성지를 모두 완주하던 날, 두 사람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평생 마음 속에만 품었던 소원을 풀 기회는 어느 날 폭풍처럼 다가왔다. 섭리는 한국교회 최초의 시각장애인 본당인 성라파엘사랑결준본당(이하 사랑결본당)에서 시작됐다. 본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박차이(실비아·66·인천교구 부천 역곡2동본당)씨가 틈틈이 성지순례를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언니, 저희도 데려가줘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떼를 쓰듯 매달렸다. 그리고 새로운 눈이 생겼다. 박씨는 사촌오빠 이우일(베드로·74·서울 혜화동본당)씨를 길잡이로 초대했다. 그렇게 네 사람이 첫 걸음을 뗀 게 지난해 9월이었다.
“저희 힘만으로 이렇게 꿈같은 일을 이뤄냈다고 생각지 않아요.”
지난 여정을 떠올릴 때면 울컥하는 마음부터 인다. 두 명의 시각장애인에 두 어르신이 함께 나선 길, 더구나 이씨도 지체장애가 있어 순례길 자체가 녹록치 않았다. 성지순례 계획이 잡히면 안내 책자를 볼 수 없는 두 사람을 위해 박경숙씨 남편이 내용을 일일이 음성파일로 만들어줬다.
“성지의 윤곽을 최대한 머릿속에 담아가기 위해 매번 수십 번씩 듣기를 반복했습니다.”
성지에 도착하면 박차이씨와 이우일씨의 손길이 바빠졌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두 사람이 성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이끌었다. 손이 눈을 대신한 셈이다. 보통 사람들이 1시간이면 돌아볼 성지를 되짚어 나오는 데만 몇 배의 수고가 필요했다. 매주 두세 곳의 성지를 돌아보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지난 2월에 찾은 부산교구 삼랑진 김범우 묘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보니 날마저 저물었다. 어렵사리 묘를 발견하고는 어찌나 반가웠던지 네 사람 모두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한두 가지씩의 장애를 지닌 데다 대중교통편을 이용해 성지를 찾아다니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어렵사리 성지에 도착하면 문이 잠겨있기도 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퇴근해 다시 발걸음을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짜낸 아이디어가 성지 도착 시간이 늦을 만하면 미리 성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순례 확인 도장을 찍어 약속한 장소에 남겨두게 했다.
전주 치명자산 성지를 찾았을 때는 빗속에서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느라 고생한 기억이 두고두고 남는다.
“두 천사가 없었으면 지금도 완주하지 못했을 거예요.”
박차이씨는 두 사람을 천사라고 부른다. 두 사람 덕분에 자신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다.
“100군데가 넘는 곳이라 한 5년은 족히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허허.” 이씨는 자신들이 한 일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이제 네 사람은 새로운 순례를 꿈꾸고 있다.
“성지를 순례하며 하느님께서 저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희의 순례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 70대 부부 이근하·이인희씨
▲ 이근하·이인희씨 부부가 전국 성지 순례를 완결한 후 받은 축복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78·76세 고령에도 전국 성지 1년 만에 완주
“성지 찾기 쉽지 않아 … 정확한 안내판 필요”
인천교구 부천 상1동본당(주임 안규도 신부) 이근하(로베르토·78)·이인희(로사리아·76)씨 부부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책자에 등재돼 있는 국내 성지 111곳을 지난해 3월 7일부터 올해 3월 21일까지 꼭 1년 만에 완주했다. 인천교구 강화도 갑곶순교성지를 시작으로 대전교구 천안 성거산성지에서 끝맺는 대장정이었다.
나이 80을 바라보는 노부부에게는 1년 내내 쉼 없는 강행군이었다. 방문한 성지마다 한 군데도 빠뜨리지 않고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책자에 방문 확인 성지 직인을 받았고 주교회의 심사를 거쳐 5월 8일 옥현진 주교로부터 축복장을 받았다.
부부가 성지순례를 떠날 때 소지했던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에 성지마다 순례를 마치고 자필로 순례 소감을 기록했다.
이근하씨는 중학교 생물 교사로 33년간 근무한 후 1999년 퇴직했다.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은 것은 2001년이다. 아내 이인희씨(1985년 영세)보다 한참 늦게 신자가 됐다.
늦은 만큼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던 이근하씨는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전국 성지 순례를 결심했다. 성지순례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이 결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큰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
이근하씨는 순례를 시작할 때부터 치밀한 계획과 준비로 1년 동안 순례를 완성하기로 했고 당초의 계획을 그대로 차곡차곡 시행했다.
서울과 부산, 인천은 버스와 전철을, 제주는 비행기와 렌트카, 선박을 활용했다. 그 외는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자가용을 운전했다. 교통량을 고려해 주말은 가급적 피했고 성지 사무실이 쉬는 월요일에도 순례에 나서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완주한 성지가 111군데나 되다 보니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책자에 성지 직인을 받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성지는 한국교회 레지오 마리애 발상지인 목포 산정동성당이다. 산정동성당 순례를 마치고 나자 성당에 아무도 없었다. 성당 직인을 끝내 못 받은 채 부천 자택으로 돌아왔다. 성당 직원과는 뒤늦게 전화 연락이 돼 결국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를 등기로 산정동성당에 부치고 성당에서는 직인을 찍어 다시 등기로 보내줘 빈자리를 채웠다.
전국 성지 순례를 완결하는 데 가장 험난한 관문인 제주교구 추자도 ‘황경한 묘’는 추자도까지 어렵게 가서도 초행길에 묘 위치를 찾지 못해 몇 번을 헛걸음 하다가 현지 주민의 도움으로 묘를 발견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제는 추억의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근하씨는 전국 성지순례를 마치며 바라는 점 하나를 한국교회에 요청했다. 지금의 성지 안내판으로는 정확히 찾아가기 힘든 곳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마산교구 명례성지는 길목길목마다 길 안내가 친절하게 돼 있어 기억에 남는 성지로 꼽았다.
▲ 절두산성지를 찾은 네 사람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우일씨(뒷줄)와 박차이·박경숙·김연숙(앞줄 오른쪽부터)씨.
▲ 111곳 성지순례를 마친 이근하·이인희씨 부부. 연풍성지에서 기도하는 이인희씨의 뒷모습을 남편 이근하씨가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