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1789년 즉위한지 13년이나 되는, 37살에 이르러서야,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왔던 일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그것은 부친 사도세자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기 위한 조치로서 부친의 묘를 이장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선친의 묘 자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뒤를 이을 왕세자가 없다는 신하들의 잇따른 상소를 받아들인 것이기도 했다.
정조는 본처인 소희왕후 몸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하였고 단지 의빈 성씨의 몸에서 아들 문효세자를 얻었지만 5살의 어린나이로 죽고 말았고,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던 때였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의 영우원(현 서울 흥인지문 밖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 방치돼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당대 최고의 명당자리로 알려진 본래 수원주민들이 살던 읍치였던 화산(花山, 현륭원, 현 융건릉 자리)으로 천봉하게 됐다. 화산은 뜻 그대로 ‘꽃동산’이란 뜻인데,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고 경치가 수려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정조의 화성축조 계획과 함께 사도세자의 묘가 화산으로 결정되면서, 조상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수백호가 넘는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됐다.
정조는 화산의 주민들에게 그 당시 땅값의 3배가 넘는 10만냥을 배상비로 지급했고, 조정에서 빌린 환곡을 탕감해 줬으며, 향후 10년간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고, 새로운 읍치인 팔달산 아래로 주민들의 땅을 마련해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자신이 늘 주민들에게 빚을 졌다고 여겼고, 한양 외에 지방인 수원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문과 무과 과거시험을 시행, 수원사람들을 두루 등용했다.
정조는 ‘한사람의 백성이라도 피곤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불로일민(不勞一民)의 정신을 구현하려 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백성 한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폐를 주지 않으려 한다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가 될까 생각해 본다.
정조의 이같은 정신은 모든 정치, 사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도 꼭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정조의 모습을 보면서, 본당의 신자 한 사람이라도 힘들게 하지 않는 사제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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