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정조18년) 정월에 정조는 팔달산에 올라 수원화성 건설의 대강령을 하교했고 마침내 역사적인 성역건축이 시작됐다. 수원화성은 한겨울과 한여름 3개월을 쉬고도 착공한지 만 2년 6개월만인 1796년(정조 20년) 9월에 완공됐다. 역사 이래 최초로 국책사업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노임을 지불함으로써 현대 경제 원리를 수용, 공사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수원화성은 대문 4곳, 암문 5곳, 연무대 2곳, 공심돈 3곳, 치성 10곳, 포루 9곳, 각루 4곳 행궁을 포함해 총 108개의 건축물로 이뤄졌다. 석수, 목수, 미장공 외에도 연인원 70만 명이 동원됐고 총사업비가 87만 3517냥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다산 정약용은 수원화성을 천지인(天地人)의 조화와 상생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지세의 순리에 따라 설계했고, 거중기를 새롭게 고안해 작업 능률을 높였다.
또 치성, 공심돈, 여장 등을 설치해 성을 방비하는데 효율성을 극대화했고, 성벽의 밖은 돌로 축대를 쌓고, 안쪽은 황토를 채워 외축내탁형으로 만들었다. 안쪽의 황토는 성 안에 연못을 만들기 위해 파낸 흙이었다. 연못을 파서 가뭄을 대비했고 그 파낸 흙은 성벽의 안쪽에 채움으로써 온갖 야생화와 들풀이 자라게 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벽 안쪽에는 야생화와 들풀이 사라지고 어딜 가나 인위적으로 심겨진 잔디만 보여 자연스러운 멋이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수원화성의 화(華)자는 아름다울 화자로, ‘수원의 아름다운 성’이란 뜻을 담고 있다. 군사적인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진 다른 성들과는 달리, 수원화성은 성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전혀 두렵지 않고 평안한 마음이 들도록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지어졌다.
정조는 수원화성에 장용영을 설치 왕권을 강화하고 군사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병농일치를 실현했다. 만석거 등 농업기반시설을 확충하면서도, 수원 춘팔경, 수원 추팔경의 자연경관도 함께 조성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의문사 이후, 천주교대박해가 시작되고 수원화성이 순교현장으로 뒤바뀌게 됐으니 순교자들의 거룩한 피가 뿌리내린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바라보는 감회는 더 깊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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