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에 대한 강조
회칙 「진리의 광채」는 현대 윤리신학 안에서 영향력을 확산하고 있는 비례주의(proportionalism)와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경향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학술적 문헌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 회칙은 학문적 특성을 넘어 여러 측면에서 고유한 위치를 갖는다. 무엇보다 회칙은 다른 어떤 회칙들보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강조를 담고 있다. 회칙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의 복구와 활성화를 통해 현대의 윤리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를 표방한다. 따라서 회칙은 한 해 전에 반포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이 새롭게 집대성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의 연계를 강조한다. 회칙의 관점에 따르면, 현대 윤리신학과 많은 윤리 신학자들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의 통일체적 특성을 포기함으로써 윤리적 규범의 합의점과 권위를 스스로 상실해버렸다는 것이다.
자연법의 보편성과 불변성에 대한 옹호
회칙의 전통에 대한 강조는 윤리신학에 있어서 자연법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자연법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이성의 빛에 비추어 간파할 수 있는 윤리적 지침이다. 회칙은 자연법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의 복구를 통해 현대의 윤리적 상대주의를 뛰어넘고자 한다. 회칙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 윤리신학의 “물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반대는 자연법의 전통적 개념을 반대하는 차원에까지”(47항) 이르렀기 때문이다.
회칙의 설명에 따르면, “자연법은 하느님의 영원한 법의 인간적 표현”(43항)이다. 즉, 자연법은 영원한 신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법은 참여적 신율(theonomy)이기 때문에 자율(autonomy)과 타율(heteronomy)이라는 두 극단적 방식을 피한다.
회칙은 자연법의 두 가지 특성인 보편성(universality)과 불변성(immutability)을 강조한다. 자연법의 이 두 특성을 옹호하기 위해 회칙은 인간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단일적 인격체로 존재한다. “육체를 포함하는 전 인격체는 인간에게 완전히 맡겨져 있으며, 인간이 그 윤리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은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안에서다”(48항). “자연법은 인간의 고유하고도 원초적인 본성, 곧 ‘인격체의 본성’에 속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자연법은 자유와 본성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허용하지 않는다”(50항).
세속의 학자들은 현대 세계 안에서 문화적 변화를 강조하고 자연법의 보편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며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적 규범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종의 역사의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회칙은 현대의 이러한 역사의식에 반대한다. 인간은 다른 문화들 속에 존재하지만 인간의 어떤 특성 또는 인간 본성은 문화를 초월하며 문화의 척도가 된다고 회칙은 주장한다. 즉, 변하지 않는 인간의 근본 본성이 자연법의 보편성과 불변성의 기초라고 회칙은 말한다(53항). 물론 이러한 자연법의 보편성 주장이 인간 존재의 개성과 각 개인의 절대적 고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 행위는 참된 선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51항).
자연법의 보편성과 불변성에 대한 강조는 결국 인간 윤리 행위는 어떤 분명한 규범에 의해 판단될 수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을 감안하면서 보편적이고 변함없는 윤리 규범에 대해 가장 알맞은 정식을 추구하고 발견할 필요성을 갖는다.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윤리 규범의 올바른 정식화와 권위 있는 해석은 교도권이 역사적 상황들에 비추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며, 동시에 신자들의 신앙 감각과 신학자들의 신학적 성찰 작업들과 협력의 과정을 요구한다(53항).
하느님, 구원, 윤리의 상관성
이 회칙이 반포된 후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 의미이든 또는 긍정적 의미든, 회칙의 대담함에 놀람을 표현했다. 왜냐하면 회칙이 현대화된 세상에서 대담하게 전통적인 윤리를 재강조하고, 탈권위화 되어가는 현대 세속 사회 안에서 교계적 권위주의의 경향을 드러내며, 교회의 가르침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대의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 대해 억압적인 교조주의의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칙의 대담함은 무엇보다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점점 어려운 현대 사회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복음주의적 색채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 하느님에 대한 질문을 중심에 놓은데 있다. 윤리적 문제들은 인간 구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즉, 윤리적인 문제들은 하느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신학적 탐구의 맥락 속에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단순히 인간의 영성적 대상이거나 인간 존재의 깊이를 명료화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적 삶에 관한 탐구의 대상이다. 하느님에 대한 질문과 탐구는 결국 인간의 윤리적 문제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그래서 구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 윤리적 진리에 대한 교회의 선포는 교회 구성원들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살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제로 수행할 때 그 실제적 효과를 나타낸다. 사진은 지난 4월 13일 서울 청계광장과 청계천변 일대에서 열린 프로라이프 ‘2014 생명대행진’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II. 논쟁과 한계
진리와 자비
회칙이 주장하는 진리가 추상적 관념의 진리가 아니라 인격적 진리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진리라는 관념은 자칫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경향을 낳을 수 있다. 진리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이 세 표현 모두 다 올바른 고백이며 올바른 서술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진리를 강조하는 것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것은 실제 현실에서 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발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저는 진리가 절대적이라고 신자들에게조차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것은 이탈되어 있는 초월적인 것, 모든 관계를 벗어나 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다. 따라서 진리는 관계다.”
교도권과 신학(또는 신학자)
회칙의 반포 후 많은 윤리 신학자들이 불편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회칙 안에는 윤리 신학자들이 도덕적 상대주의를 가르치고 있다는 잠재적 비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칙은 이 시대의 윤리 신학이 상대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실증주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문화의 맥락 안에서 신중한 식별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12항). 그리고 무엇보다 “윤리 신학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그 직책 수행을 통하여 교의와 윤리 분야의 교도권 가르침에 대한 충직한 동의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111항)고 강조한다.
교회의 가르침의 직(the Church’s teaching office)은 단순히 교도권 그 이상을 포함한다. 교회의 가르침의 권위는 신자들의 신앙감각, 신학자들의 공동체, 교도권이라는 세 개로 분류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는 이 셋은 수직적 상하의 질서관계를 뜻했지만, 공의회 이후에는 일종의 삼각형적 협력관계로 이해된다. 신앙감각, 신학, 교도권이라는 세 권위는 교회의 가르침의 직에 각자의 역할이 있다. 어떤 하나의 권위가 다른 두 권위들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수행할 수는 없다. 즉, 교도권 역시 신자들의 신앙감각에 늘 귀 기울이고, 신학자들의 성찰들에 언제나 열린 태도로 있어야 한다. 또한 이 시대의 권위에 대한 이해는 예전과 다르다. 권위는 소유가 아니다. 권위는 관계의 질이다. 권위는 어떤 개인들에게나 어떤 객체적 대상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권위는 두 실재들(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그 권위를 증명하는 것)의 관계 사이에서 유지되는 것이다.
선포와 수행(실천)의 간격
회칙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윤리적 진리의 분명하고도 확고한 제시는 결코 그 깊고 성실한 준수와 분리될 수 없다”(95항). 교회는 “선포된 말씀의 선물뿐 아니라 생활로 실천된 말씀의 선물을 통하여”(107항) 복음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 윤리적 진리에 대한 교회의 선포는 교회 구성원들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살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제로 수행할 때 그 실제적 효과를 나타낸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이 참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교회 자신이 먼저 그 가르침을 수행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세상의 변화와 교회의 쇄신은 언제나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정희완 신부는 안동교구 소속으로 1993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미국 버클리 예수회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