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는 우리나라에 신앙을 뿌리내린 초기 교회의 신자들로 103위 성인의 아버지 세대다. 1984년 시성된 103위 성인은 기해(1839년)·병오(1846년)·병인(1866년)박해에 순교한 반면, 이번 시복된 124위는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대부분이 1801년 신유박해에 순교하는 등 103위 성인보다 30년 이상 앞선 세대의 순교자다. 103위 성인도 124위 복자들의 신앙을 이어받았다. 교구가 현양하는 31위 복자도 을묘박해(1791년) 3위, 신유박해(1801년) 20위, 을해박해(1819년) 2위, 기해박해(1839년) 3위, 병인·무진박해(1866~1868년) 3위 등으로 대부분 초기 교회 신자들이다.
을묘박해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최인길(마티아)·지황(사바) 복자는 성직자 없이 뿌리내린 조선교회에 성직자를 들이기 위해 밀사로 활약했던 이들이다. 선교사가 조선에 올 수 있도록 윤유일과 지황은 여러 차례에 걸쳐 북경을 방문했고, 이들의 노력으로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역관이었던 최인길은 주 신부가 거처할 집을 마련하고 통역을 맡았다. 밀고로 주 신부의 입국이 발각되자 주 신부를 피신시켰다. 그들은 판관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심한 고문에 맞아 죽기까지 주 신부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다.
주문모 신부는 비밀리에 신자들을 만나 성사를 집행하고 명도회를 조직, 교리서 집필 등 다양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의 노력으로 조선교회의 신자수가 1만 명에 달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활동한지 6년이 되던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주 신부의 거처를 말하지 않고 고문과 죽음을 당하자 주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 앞에 나가 순교한다.
124위 복자들이 가장 많이 순교한 신유박해는 교구가 현양하는 31위 중에서도 20위의 복자가 순교한 큰 박해였다. 이때 신자들이 많이 살았던 양근과 여주, 광주유수의 치소가 있었던 남한산성 등에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윤유오(야고보)를 비롯한 7명의 복자가 태어난 여주 지역과 조용삼(베드로)를 포함한 5명의 복자의 고향인 양근은 신자들이 생활하던 터전임과 동시에 순교의 현장이 됐다. 양근은 선교사 없이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던 신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또 천진암이 인근에 있는 여주 역시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파됐다. 복자들은 자신만이 신앙의 길을 걷지 않고 가족과 신앙을 나누며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때 순교한 복자 중에도 가족이 많은데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와 그의 사촌 윤점혜(아가타)·윤운혜(루치아) 자매, 윤운혜의 남편 정광수(바르나바)와 정순매(바르바라) 남매 등의 복자들이 이때 함께 순교했다.
▲ 윤유오는 형인 윤유일을 통해 입교한 후 고향 안근에서 교리 모임을 가지며 신앙을 지키다 체포됐다. (탁희성 작)
사제가 없던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이어온 복자들은 깊은 믿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다. 복녀 윤점혜·정순매 등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동정녀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고, 옥중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켜나갔다. 아직 예비신자였던 복자 조용삼도 부활대축일에 복자 이중배(마르티노)·원경도(요한)와 함께 체포됐는데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숨을 거뒀다.
광주 지역에서 난 복자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 이중배는 옥중에서 의술을 베풀었다. ‘그를 찾아온 이들은 모두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몰려온 이들로 옥문이 장터 같았다고 한다. (탁희성 작)
광주에서 태어나 신앙을 키우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정철상(가롤로) 부자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명도회장으로 최초 한글교리서 「주교요지」를 집필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던 복자 정약종도 신유박해에 순교했다. 부친 정약종과 함께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복자 정철상은 부친이 체포되자 옥바라지를 하다가 정약종의 순교 이후 체포돼 부친을 따라 순교했다.
당시 광주유수의 치소였던 남한산성에서는 복자 한덕운(토마스)이 순교했다. 신자로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아무도 거두지 않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던 한덕운은 혹독한 형벌에도 밀고하지 않고 참수를 당했다.
▲ 한덕운은 끔찍하게 고문 당해 죽어있는 교우들 시신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일일이 장례를 치러주다 자신도 교우임이 발각돼 체포됐다. (탁희성 작)
신유박해 이후에도 복자들은 교구 내 교우촌에서 신앙을 실천하며 살아갔다.
복자 조숙(베드로)·복녀 권천례(데레사) 부부는 1819년 8월 10일 함께 순교했다. 이들 부부는 동정부부로 생활하면서 신심이 날로 깊어져 기도와 복음 전파, 남을 위한 애긍을 실천하며 살다 1817년 잡혔다. 부부는 2년 이상 옥살이를 하면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키다 참수형을 받았다.
죽산에서 순교한 복자 박경진(프란치스코)과 복녀 오(마르가리타) 부부도 어떤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다 1968년 9월 28일 같은 날에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복녀 이성례(마리아)는 박해를 피해 수리산에 정착해 남편 성 최경환(프란치스코)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일궜다. 이성례는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손수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끌려가 1940년 당고개에서 목숨을 잃었다.
요당리 지역 교우촌에서 태어난 복자 장(토마스)도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교회의 일을 도왔다. ‘착한 사람’으로 불리던 복자는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다”며 믿음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