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대장 시절 저의 전투복 주머니에는 항상 묵주가 들어 있었습니다. 행여 묵주를 챙기지 못한 날은 허전하고 불안해서, 출근길에 묵주가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되돌아가 묵주를 챙겨 오곤 했습니다. 소대원들 사이에 불화나 문제가 있지 않을까 늘 걱정스럽고 불안해서인지 묵주기도를 많이 하지 못하면서도 묵주에 집착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직 근무를 서고 있는 저에게 갓 전입 온 이등병이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아직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등병이 남들 몰래 면담을 신청하는 것을 보면 소대 내의 부조리로 힘들다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덜컥 걱정부터 됐지요.
다음 날, 다른 병사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고 그 이등병과 면담을 시작했습니다. 그리 큰 일이 아니길 바라며 전투복 오른쪽 주머니 속 묵주를 움켜쥐고서….
하지만, 우리 소대 막내가 털어 놓은 고민은 소대 내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친구가 임신을 했고, 낙태를 하려고 하는데 백일휴가를 일찍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갓 스무살이 지난 자신들은 아이를 키울 능력도 없고 부모님께 이야기해 봤자 결코 도와주시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게 해결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요. 뱃속에서 숨쉬고 있는 소중한 생명을 인위적으로 앗아가는 그 끔찍한 행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 잘 알지만, 그 병사가 처해 있는 현실적 문제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휴가를 조정해 주어 낙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밖에는 없는 것일까? 내가 믿는 신념과 어긋난다고 해서 휴가일정도 조정해 주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그날 밤, 숙소에서 저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병사와 여자친구, 그리고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아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그 이등병을 다시 불러 만약 전역 이후 직업 문제가 보장되고 어머니가 군복무 동안 여자친구를 보살펴 주실 수 있다면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하면서도 군에 갇혀 있는 현실에서 그게 가능하겠냐고 반문하더군요.
저는 친화력이 좋고 특히 운동을 잘하는 그에게 부사관의 길을 안내했고, 부사관 선발을 위해서 소대장이 적극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도 돕겠다고 했고요. 그리고 휴가를 보냈습니다. 3박4일, 그 병사의 휴가기간 내내 저는 전투복 주머니 속 묵주를 손에 꼭 쥐고 근무했습니다.
휴가복귀 날, 그 이등병은 저에게 “아이 낳기로 했습니다. 대신 소대장님이 부사관 선발 꼭 도와 주셔야 합니다”라며 밝게 웃었습니다. 3박4일 동안의 긴장이 한 순간에 풀리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다행히 그 이등병은 부사관에 선발됐고, 지금도 중견 부사관이자 한 가정의 가장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