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구성·창작 정영훈 연출 유환민
CY 씨어터
고운 종이에 꾹꾹 눌러 마음을 담아 쓰고, 맑은 봉투에 곱게 접어 넣어 우표까지 잊지 않고 붙인 다음,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띄워 보낸지가 언제인지, 아니 그런 적이 있기는 했는지 가물가물하던 터에 무대 위에 알록달록한 바람(風)과 함께 펼쳐진 몇 통의 편지를 만났다. 이 편지들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모두 온전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가 무대 위에서 펼쳐질 수밖에 없었던 탓은 편지 모두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 혹은 직후에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에 모인 까닭이다. 그리하여 ‘전쟁’이라는 극박한 사건으로 인해 저 편지는 온전히 가닿지 못하였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 여름 무대 위 편지에 담긴 마음이, 그들의 사연이, 안타까운 바람이 펼쳐진다.
바람개비를 통해 형상화된 바람(風)이 무대 한복판을 가른다. 이어 실제 편지의 내용이 고스란히 무대 뒤 배경으로 영상화되어 보인다. 그 편지의 발신자는 어느 시골의 농부, 군사 훈련 때문에 가족을 남쪽에 두고 북으로 가게 된 어느 아비, 전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헤어진 부부, 포화 속에 시누이를 잃게 된 오빠를 위로하는 여동생. 어느 하나 바르게 쓰여진 글씨체가 없다. 편지의 여백이 부족할 정도로 귀퉁이까지 채워진 깨알 같은 글씨, 불안한 듯 삐뚤삐뚤 쓰인 문장, 발음 되는대로 쓰여진 어색한 단어들. 저 문장과 편지에 담긴 마음이 더 안타깝고 애절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편지의 화자가 되어 글씨 넘어, 문장 사이에 숨어 있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가며 하나하나 읽어 나간다. 그리하여 현재 무대 위 공연이 진행되고 있는 시간을 넘어서 포화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귓가를 울리는 그때,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시간, 그 마음으로 관객들을 이끌고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관객 역시 막연한 마음을 헤아리려는 것을 넘어서 편지의 발신자가 되고 수신자가 되어 절절하고 가슴 아린 사연의 한복판에 주인공이 되어 덩그러니 서 있게 된다. 비록 ‘전쟁’이라는 그 폭력에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저 연극을 들여다보다 스치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나 또한 발신자의 손을 떠났지만 아직 받아 보지 못한, 아니 받았으되 펼쳐 읽어보지 못한 편지가 있는 것을 아닐까. 발신자 하느님께서 보내는 편지들이 수신자 우리에게 와 닿지 못한다면? 그것이 외부적, 물리적 탓이 아니라 마음의 분주함으로 인해 놓쳐버린 우리의 탓이라면? 수신자의 마음에 놓여 있고 눈앞에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놓쳐 버리고 눈 감아 버린 탓이라면? 저 편지들과는 또 다른 의미의 애석함과 안타까움으로 깊은 한숨을 지을지도 모를 일이다.
발신자의 바람이 수신자의 마음에 바람(風)이 되어 전해지지 못 함을 편지의 한 문장을 빌어 저 연극의 맨 마지막에 표현된다. ‘빨리빨리 달아나라, 편지야. 달아나라, 마음아.’ 나 또한 외친다. 반대로, 시간을 거슬러 다시금 수신자의 마음이 발신자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그 마음을, 그 애절함을, 그 간절함을 받아 안아 편지 겉봉투의 적힌 온전한 수신자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니다 할지라도 그 마음만큼은 온전히 전해졌음을 담아 내가, 우리가 수신자가 되어 편지의 발신자에게 다시금 외친다. “빨리빨리 달아나라, 편지야, 달아나라 마음아.”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 2004년 서품을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예술학협동과정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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