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인 1932년 파리외방선교회의 프랑스 태생 심응영(뽈리 데시데라도) 신부가 수원성당에 주임신부로 부임했을 때는 수원본당 교우가 수십 명에 불과했고, 수원화성 안에 무당집이 한 집 걸러 한 집일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심 신부는 사목위원들과 함께 종로사거리(십자로)로 나가, 오고가는 행인들에게 선교지를 나누어 주며 가두선교를 했다. 그런데 행인들은 외국인 신부를 보고 깜짝 놀라며 “천주교를 믿어요? 큰일 날려구요”하며 죄다 피해 도망가 버리더라는 것이었다.
1866년 한불통상조약 이후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는데도 박해시대부터 “무당짓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천주학쟁이만은 되지 말아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수원화성 안에서는 천주교에 배타적이어서 선교가 통 되질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심 신부는 성모님께 전구드리며 ‘수원의 거룩한 순교를 기념’하고 ‘미신을 타파’하기 위한 두 가지 목표로 성전 건립의 뜻을 세웠고 악신을 물리치는 성 미카엘 대천사를 주보로 모셨다. 당시는 팔부자집을 개조해 임시성당으로 사용하던 중이었다.
심 신부는 당시 공세리성당 주임신부였던 파리외방선교회의 드비즈 신부에게 수원성당 설계를 맡겼고, 고향 프랑스에서 모친이 보내준 삯바느질로 모은 봉헌금과 고향 마을사람들의 성금을 보태어 수원본당 교우들과 함께 벽돌을 지어 나르며 수원최초의 고딕식 연와조 성당을 건립하였다. 수원 최초의 근대 고딕식 문화재 성당이었다.
6·25전쟁 직전 천안성당으로 발령을 받은 심 신부는 전쟁 중 피난을 가지 않고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미처 피난가지 못한 신자들과 주민들을 수호하다가 성당 안에서 인민군에 의해 체포되어 끌려갔고 1950년 9월 대전에서 총살형으로 순교했다. 심 신부는 근·현대 6·25순교자로 214위 중 하느님의 종의 한 분으로 선정됐다.
수원성당은 폭탄이 떨어져 지붕이 뻥 뚫려 하늘이 보일 정도였고, 성당 벽에 총탄구멍이 백여 군데가 넘을 정도로 심한 타격을 입었다. 보수하여 한동안 사용하다가 결국 붕괴위험으로 헐리고 말았다. 수원성당은 교구 분할과 본당 분할이 되면서 북수동성당으로 개칭됐고 2000년에 수원성지로 선포되었다. 하루 속히 구 수원성당이 복원되기를 성모님께 전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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