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과 성격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개신교 신자들을 대하는 자세와 불교 신자들을 대하는 자세를 자문해 본다면 어떠한 대답을 얻게 될 것인가? 물론 개인의 경험과 환경마다 다르겠지만, 적지 않은 신자들이 개신교 신자들보다 불교신자들이 대하기 더 편안하다는 의견들을 내놓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단순히 표현하자면 천주교와 개신교는 서로 경쟁과 대립 관계에 놓인 시간이 적지 않았고 천주교와 불교는 사실 직접적으로 대면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식구이면서도 서로 많이 다툰 형제들 보다는 피붙이가 아닌 친구들이 더 편안한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그리스도교에도 해당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교회는 단일하게 설립되었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지만(요한 17,11 참조) 이천 년의 역사 안에서 교회는 분열을 거듭하였고 같은 형제들에게 서로 큰 상처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11세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및 16세기 종교개혁을 계기로 한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뉘는 서방교회 내부의 분열은 당신의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였다. 다행스럽게도 20세기 초반에 가톨릭 교회 밖에서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교회일치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성령의 움직임으로 파악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를 가톨릭 교회 안에 수용하여 지난 50년 동안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교회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서 교회일치를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제 삼천년기를 앞두고 갈라진 그리스도교의 모습은 예수님의 원의와 교회의 사명에 배치되고 복음화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반목한 형제를 대하는 것보다는 사이좋은 친구들 대하는 것이 더 용이할 수 있으나, 예수님의 오심을 기념하고 다시오심을 기대하는 희년에 집안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집안 어른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이 교황님의 입장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 해결의 난점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님은 이 문제를 주제로 삼음으로써 교회일치운동이 갈라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실질적인 화해와 상호이해의 결실을 가져오기를 희망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5년 5월 25일 반포한 이 짧지 않은 사목적 회칙을 통해서 교회일치운동에 관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1부), 지난 30년간 교회일치운동의 성과를 일별하며(2부),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한다.(3부)
주요 내용
상당히 긴 분량의 회칙을 빠짐없이 요약하는 것은 필자의 부족함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회칙의 이해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회칙에서 교황님이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고유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교회일치운동을 영성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교황님은 일치, 회개, 기도, 양심성찰로서 대화 등의 표현을 통해 그동안 상호 이해와 신학적 대화, 공동의 활동에 중점을 두었던 교회일치운동에 영성적 차원을 강조한다.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일치 개념의 이해이다. 그동안 교회일치라는 단어는 갈라진 그리스도교 교회들 사이의 일치를 우선적으로 의미했는데, 교황님은 일치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이 일치는 단지 개인들의 집합인 사람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가톨릭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친교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 안에 드러나는 것입니다…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일치를 갈망하는 것이고, 그것은 교회를 갈망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은총의 친교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9항)
교회일치의 근본은 하느님과의 일치이고 하느님과의 일치 없이는 교회일치가 있을 수 없다는, 거꾸로 말한다면 교회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진정으로 일치하여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근본적인 지적이다.
둘째, 교황님은 회개를 강조한다. 가장 먼저 교황님은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루카 22, 32)의 말씀을 가리키며 교황의 회개를 위해서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모든 이들에게 청한다.(4항) 아울러 일치운동과 관련하여 신앙인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그 회개란 곧 형제적 사랑을 심각하게 해치는 배타행위, 용서의 거부, 오만, ‘상대편’을 단죄하는 복음에 어긋나는 고집, 그릇된 편견에서 비롯된 경멸 등에 대한 자각입니다.”(15항)
셋째, 교황님은 특별히 교회일치에 있어서 기도의 차원을 강조한다.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하는 기도를 “모든 일치운동의 영혼”이라고 표현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교황님은 신자들에게 갈라진 형제들과의 공동기도를 권유하며 이를 통해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표명한다. 교황님은 자신이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과 함께 기도했던 감동적인 순간들을 상기시키며 이미 교회 안에 정착된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뿐만 아니라 모든 기회에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얻는 것이 없습니다”(25항)라는 말씀과 “일치 추구의 본질적인 조건인 마음의 회개는 기도에서 우러나오며 그것을 실현으로 이끄는 것 또한 기도입니다”(26항)라는 말씀은 교황님이 기도를 그리스도교 일치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으로 여긴다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기도의 관한 교황님의 이해는 대화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도가 교회일치를 위한 쇄신과 일치를 위한 갈망의 ‘영혼’이라고 한다면, 기도는 공의회가 ‘대화’로 규정한 모든 것의 토대이자 기둥입니다.”(28항) 이로부터 네 번째 특징인 대화의 영성적이며 실존적 성격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교황님은 교회일치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대화’가 지녔던 기존의 이해와 다른 새로운 이해를 제시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대화는 인간의 자아실현, 곧 개인과 모든 인간 공동체가 자아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피할 수 없는 단계입니다. ‘대화’(dia-logos)의 개념에서 인식의 차원이 우선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모든 대화는 보편적이며 실존적인 차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대화는 단순히 사고의 교환만은 아닙니다. 어느 면에서 대화는 언제나 ‘은총의 교환’입니다.”(28항)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화를 상대방과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의사소통으로 여기고 이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황님의 이해에 따르면 대화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안다는 인식의 차원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에서 인간의 자아실현과 관련된다. 개인이면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홀로 자아실현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상대방과 마주하는 대화는 이러한 자아실현 과정에서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을 실현하고 그를 통해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총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러한 대화는 인간 구원에 또한 필수적이다.
“기도와 대화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그러한 대화는 양심성찰이 되어야 하며…‘회개의 대화’…‘구원의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대화는 수평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대화는 우선적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시며 역사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화해 자체이신 분을 향하는 수직적 추구여야 합니다.”(33항)
이와 같이 교황님은 대화의 실존적 차원을 강조하며 모든 대화가 하느님과의 대화로부터 비롯된다는 대화의 원천을 지적한다.
영성적인 특징을 강하게 지니는 위의 네 가지 점을 볼 때 교황님은 그동안 진행되었던 교회일치운동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교회일치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교회일치운동은 결국 하느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며 인간 구원에 있어 불가결한 교회와 신앙인들의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정훈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후 2001년 사제로 서품됐으며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 연희동본당 부주임을 거쳐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로 봉직 중이며,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 자문위원과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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