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회칙의 배경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8년 9월 14일에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밝히기 위해 발표한 회칙이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 인류는 꽤 긴 시기 동안 자연적 이성에만 의존하여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 왔다. 때가 찼을 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민의 구원 의지를 선포하셨다. 그 기쁜 소식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주변세계로 널리 전해져야 했다. 당시는 헬레니즘-로마 시대였기 때문에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문화 유산은 고대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사도들과 교부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자연히 초자연적 계시와 자연적 이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사이의 이 만남은 교부들과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을 통해 각각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는 방도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를 거치면서 이처럼 어렵게 성취된 조화로운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기되고 각기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부정적인 귀결들이 현대에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치정권 하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공산치하에서 사상 또는 이데올로기가 개개인과 사회의 생활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교황은 자신의 사목 방향을 제시하는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1979)에서부터 창조의 정점이자 구원의 대상인 인간이 바로 “교회의 길”임을 선언했다.(14항) 최근에는 윤리 문제를 책임진 최고 책임자로서 「진리의 광채」(1993)와 「생명의 복음」(1995)이라는 두 개의 회칙을 통해 현대 세계의 도덕적 해이와 생명경시 풍조를 강하게 질타했다. 이제 재위 20주년을 맞아 새로운 천년기의 여명이 밝아 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현대 세계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진리’ 자체에 관한 교도권의 가르침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교황은 처음부터 현대의 위험을 보고 있었다. “금세기는 인간에게 대재난의 세기, 대 파멸의 세기가 되어 왔다. 그것도 단지 물질적 파멸만이 아니고 도덕적 파멸, 참으로 무엇보다도 도덕적 파멸의 세기이다.”(「인간의 구원자」 17항)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교황이 가장 염려하고 있는 현대의 위험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결핍”이다. 현대인은 신이 없는 시대, 형이상학 부재의 시대, ‘허무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허무주의는 우리 시대의 특징인 가공할 전쟁의 경험을 통하여 정당화되어 왔다. “이런 극적인 경험은, 역사를 이성의 진보이며 모든 행복과 자유의 원천이라고 보는 합리주의적 낙관주의의 붕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20세기가 끝나가는 지금, 우리를 무섭도록 위협하고 있는 것은 절망의 유혹입니다.”(91항) 교황은 현대의 상황이 레오 13세가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 1879)를 반포하던 19세기 말의 암울하던 시대 배경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황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다른 시대의 문제들이 새로운 각도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55항) ‘이성의 진리 인식 능력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가장 절박한 문제이다. 형이상학의 죽음을 부르짖으며 19세기에 교회를 위협하던 합리주의 또는 맹신주의가 오늘날 다시 되살아났다. 이 모든 위험들은 “새로운 천년기가 끌어안아야 할 도전들”이다.(103항)
그러므로 현대는 진리의 위기 시대를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이성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신뢰를 포기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이성에 대한 근대 철학의 자족성(自足性) 선언에서 비롯된 ‘내재의 원리’(principii immanentiae)가 있다.(91항) 개신교 신학자 본회퍼의 표현대로 “성년에 이른 인류”가 이제까지의 신의 후견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기 길을 찾겠다고 고집하는 세속화의 노선이다.
교황은 회칙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번 회칙에서는 ‘진리’ 자체라는 주제와, ‘신앙’과 연결되어 있는 그 ‘기초’에 초점을 맞출까 합니다. 왜냐하면 급변하는 복잡한 현대가 특히 미래를 걸머질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정당하게 참조할 기준점이 없다는 느낌을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6항) 교황은 참된 지혜에 이르는 길이 우리의 ‘인식 능력에 대한 진정한 신뢰를 회복’하고, ‘철학의 충만한 품위를 복권시키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교황은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복원시킬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 성경의 가르침과 철학의 역사 그리고 교도권의 가르침을 역사적으로 회고한다.
2. 성경의 가르침: 함축적 철학
지혜를 갈망하는 것은 만민의 공통 특성이다. 지혜문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피조물의 웅대함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것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지혜 13,5) 그런데 세계와 역사의 사건들은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결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인간이 이성의 빛을 통해서 어느 길을 택할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신앙의 지평 안에서 그들이 추구해야 하는 올바른 정신을 갖추고서야 비로소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그 목표에까지 따라갈 수 있다.(16항)
성경은 인간이 세계, 백성, 하느님 사이의 ‘접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21항) 계시를 통해 다가온 신비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이성이 그때까지는 감히 바랄 수도 없었던 깨달음이 하나의 가능성이 되는 그런 무한자의 영역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이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있다. 첫째, 인간 인식은 끝없는 여정이다. 둘째, 진리 취득은 개인의 정복의 결과일 수 없다. 셋째, 이성은 마땅히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 규칙들을 무시할 때 인간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결국 현자가 아니라 어리석은 자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18항)
이성이 어려움 없이 감각 소여들을 넘어 만물의 기원인 하느님께 이를 수 있는 것은 원래의 창조계획의 일부였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감히 “충만하고 절대적인 자율을 누리겠다고 나서는 불순종 때문에” 하느님께 이르는 이 통로는 위축되었다. 이 순간부터 인간의 인식 능력은 진리의 원천이시며 기원이신 분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약화되었다. 마음의 눈은 점점 더 분명히 보지 못하고, 이성은 점점 더 자기 자신의 포로가 되었다.(22항)
그리스도인에게는 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문제의 궁극적 해답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철학에 진정한 도전이다.(23항) 바로 여기서 이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 사이의 대립되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순수 인간적인 논리로 환원시키려는 온갖 시도가 실패하게 된다. 이성은 십자가로 표상되는 사랑의 신비를 제거할 수 없지만, 그 십자가는 이성이 추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십자가의 지혜는 그것을 제한하고자 하는 모든 문화적 한계를 철폐하고,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의 보편성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철학적 통찰은 세계와 인간 생명은 의미가 있으며,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는 그 충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80항)
이재룡 신부(서울대교구)는 1982년 사제품을 받고 이어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3년부터 2011년까지 가톨릭대 성신·성의교정 철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 혜화동본당 주임으로 사목 중이다. 또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 「신앙과 이성」, 「인식론의 역사」, 「철학여행」 등 다수의 양서를 우리말로 번역, 출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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