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아닌 그림으로 세상과 이야기해요.”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종이가 찢어질 듯 강한 힘으로 그림을 그려가는 펜 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길을 따라가듯 망설임이 없다. 남궁청(비오·25)씨는 말없이, 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이야기한다.
그는 선천적으로 자폐성 장애를 안고 살아왔다. 다른 사람과 사회적 상호관계, 의사소통, 정서적 유대 등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 자폐증 중에서도 가장 정도가 심한 1급으로 판정받았다. 사람들과 나누는 말이라고는 간단한 인사 정도고 의사를 표현하는 것도 “좋아”와 같은 단순한 말 정도에 그쳤다. 매일 만나고 함께하는 가족과도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대개의 자폐성 장애를 지닌 이들이 그렇듯 그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란 큰 장벽과도 같았다.
“자유로운 표현, 타고난 감각, 색 선정이 탁월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남궁씨의 개인전을 관람한 미술가와 평론가들의 평이다. 꽉 막혀있는 듯한 세상에서 남궁씨에게 세상과 이어주는 창이 되어준 것은 그림이었다. 늘 혼자만 그림을 그려오던 그였지만, 올해 6월과 8월에는 개인전을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림을 선보였다. 특히 8월 15~23일 전시에는 춘천가톨릭미술가회가 운영하는 갤러리 안젤리코에 전시회를 열면서 많은 미술가와 평론가들에게서도 호평을 받았다.
남궁씨가 그림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친인 이혜숙(율리안나·55)씨는 “청이가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시간만큼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행복해 한다”고 말했다.
한때 ‘자폐’라는 낯선 말에 사로잡혀 남궁씨의 재능을 지나치기도 했지만, “아이가 행복해 하는 일을 하게 해주자”는 일념으로 그의 부모는 직업도 도시생활도 버렸다. 최근에는 이완숙(요안나) 작가의 지도를 받게 해줬다. 이번에 개인전을 연 것도 “계속 전시를 해서 아이의 그림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이 작가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사랑 속에 성장했기 때문일까. 원색적인 화사한 색감으로 그려낸 그의 많은 그림에는 특히 사람이나 동물의 따뜻한 가족 모습이 눈에 띤다.
남궁씨는 춘천장애인종합복지관 ‘희망의 일터’에서 일하면서도 매주 2~3회 그림 그리는 시간을 빼먹지 않는다. 그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 더 행복한 시간이 생겼다.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는 그였지만 자신의 그림이 담긴 개인전 초대장이 나왔을 때는 복지관 직원이나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먼저 초대장을 건네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기뻐했다.
사회적 상호관계가 약한 자폐성 장애자들은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일이 많지만,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낸 남궁씨에겐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이혜숙씨는 남궁씨가 “그림을 그리면서 밝아졌고, 자폐성 장애 1급이지만 한 번도 문제 행동을 일으킨 적이 없다”면서 “앞으로 해마다 한 번씩은 개인전을 열도록 도울 계획”이라고 전했다.
인터뷰 내내 말이 없던 남궁씨에게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느꼈으면 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말 대신 수첩에 펜으로 그림을 그려보였다. 화사한 갈기털에 갖가지 무늬를 가진 사자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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