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차, 영차, 이렇게 구호를 맞춥니다, 알겠죠?”
“원 투, 원 투, 오케이?”(one two, one two, okay?)
수원 광주본당(주임 김길민 신부)이 19일 광주초등학교에서 개최한 본당의 날 체육대회 풍경이다. 줄다리기 경기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다. 가만 보니 한쪽 팀은 피부색이 다르고, 영어와 타갈로그어를 번갈아 사용한다. 장갑을 끼고 줄다리기를 준비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총소리가 나면 시작합니다. 준비”
‘탕’하는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서로 다른 언어가 운동장을 메운다.
“영차, 영차”
“원 투, 원 투”(one two, one two)
15초쯤 지났을까, 승리는 영어를 사용하는 팀에게 돌아갔다.
으레 있는 본당의 날 행사를 다채롭게 만든 주인공은 바로 광주 엠마우스(전담 마우리찌오 신부) 이주민 식구들.
지난 2년 동안 본당의 날 행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해, 이제는 어엿한 광주본당 ‘식구’가 됐다. 본당의 날 행사 뿐 아니라 광주본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주민 식구들이 빠지지 않는다. 구역 내 200여 명의 이주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본당 공동체에서 먼저 손을 내민 결과다.
이주민들과의 소통에 유난히 관심을 가진 사람은 본당주임 김길민 신부였다. “광주 엠마우스의 마우리찌오 신부가 나와 동갑내기라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네들을 ‘아웃사이더’(outsider)로 보지 말고, 본당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시켜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본당의 새로운 행사가 있을 때마다 광주 엠마우스 봉사자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의 의견도 제시하고요.”
광주본당과 광주 엠마우스는 각자 크고 작은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함께 상의하고 진행한다. 소통하다 보니 서로 간에 도움요청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소통의 효과를 제대로 맛보고 있는 셈이다. 특히 마우리찌오 신부는 본당과의 의사소통에 만족스러워했다.
“한국인 공동체와 이주민 공동체 간 관계가 잘 이뤄지고 있어요. 본당에서는 아예 이주민을 염두에 두고 행사와 봉사활동을 기획합니다.(웃음) 이주민들 중 몇몇은 매주 토요일 본당 신자들 자녀를 위해 영어수업을 합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거죠.”
김 신부는 이주민들의 도움호소에 아낌없는 지원을 베풀지만, 한 편으로 이주민들이 무조건 ‘받기만 하는’ 습관에 젖어버리는 위험을 경계하고자 남달리 애를 썼다.
“이주민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경제적, 심리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줄 수 있습니다. 그들도 당당하게 베풀고, 무언가 줄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체육대회 행사에서는 이주민들에게 부스를 하나 통째로 줬습니다. 다른 본당신자들과 동등하게요.” 김 신부는 이미 이주민들을 본당식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덧 다음 경기가 시작됐다. 이번엔 피구다. 경기진행에 언어의 장벽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매님 10분 나오세요!”
“텐 위멘!”(ten women!)
심판이 경기를 안내하고 규칙을 설명하면, 마우리찌오 신부가 이주민들에게 영어로 설명하며 몸소 시범을 보인다. “오케이, 오케이”를 연발하는 이주민들의 표정에 자신감이 가득찼다. 응원단장을 자처하고 나선 필리핀 이주민 멜빈(37)씨는 경기의 흥을 북돋기 시작한다.
“선 넘어가면 아웃이야!”
상대편의 으름장에도 아랑곳 않고 이주민팀은 날아오는 피구공을 맨손으로 덥석 잡는다. 이번에도 승리는 이주민들에게 돌아갔다. 한국에 온 지 석달밖에 안 된 필리핀 이주민 안나(21)씨는 “한국 사람들은 모두 스포츠 경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모두 친근하게 대해줘서 정말 재미있게 경기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주민팀이 경기에 패할 때도 있었다. 줄넘기 경기에서는 서툰 모습만 보이더니, 결국 본당신자팀이 우승했다. 승패와 상관없이 한 이주민 여성은 우승한 본당신자팀을 향해 “잘했어요, 언니”라고 외치며 먼저 달려가 얼싸안는다.
점심시간이 되자 이주민들은 행사를 위해 전날 저녁 삼삼오오 모여 준비한 메뉴를 꺼내든다. 필리핀 이주민 마리안씨는 우리나라 잡채와 비슷한 고국의 전통요리를 접시에 담은 뒤, 본당신자들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가 음식을 권한다. 넉넉한 미소와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폼이 영락없는 한국 아낙이다. “한국에 온 지 9년인데, 이제는 필리핀 음식을 먹지 않고 한국음식만 먹어요.”
마리안씨와 함께 이주민들을 돌보는 한국 봉사자 조옥자(클라라·67)씨는 이주민들 사이에서 큰언니(big sister)로 통한다. 조씨는 7년 전, 하루만 이주민들을 도와달라는 마우리찌오 신부의 요청에 못이겨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처음에는 의견차이로 마우리찌오 신부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신부님, 이렇게 하세요’라고 개인적인 의견을 내면 신부님과 갈등을 빚곤 했어요. 그런데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이주민들을 사랑하는 신부님의 모습에 감화된 후로는, ‘엄마’의 입장에서 의견을 제안하게 됐죠. 그때부터는 신부님이 잘 받아주셨어요.” 이주민들의 ‘엄마’로서 조씨는 이제 영락없이 이주민과 가족이 됐다.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진정한 봉사가 시작된다고 강조하는 마우리찌오 신부는 내년 이주민들의 성지순례 행사 생각만 하면 기분이 들뜬다. 광주본당에서 이주민들의 성지순례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원해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비록 주임신부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기도 했지만, 마우리찌오 신부는 소통이 가져다준 은총이 기대 이상이라고 강조한다. “소통을 하니까 예전보다 힘이 생겨요. 나 혼자만을 생각하면 행사를 하기도 전에 걱정이 앞서지만, 이제는 본당 공동체가 도와주고 함께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힘이 생깁니다.”
마우리찌오 신부는 소통 덕분에 본인도 영적인 변화를 겪었다고 고백한다. “예전엔 광주 엠마우스의 입장만 말하기 바빴어요. 그러나 이주민들의 이익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만 움직이면 나의 사업이 되지만, 소통하며 하느님과 함께 움직이면 하느님의 사업을 하는 겁니다. 광주 엠마우스는 이제 이주민들만 생각하지 않고 광주본당 신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소통을 위한 노력은 본당신자들 사이에서도 활발했다. 최정림(루치아)씨는 “다문화가정 시대에 놀이를 통해 같이 호흡하고, 음식을 서로 나눔으로써 가족이 확장됨을 느낀다”며 “이주민들과 소통을 위해 영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문다. 오늘 경기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즐기며 서로 소통하는 데 다들 만족했다. 행사는 김 신부의 축복으로 막을 내렸다.
“서로를 아끼고, 하나의 본당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를 이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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