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러 교구의 본당들이 일본 나가사키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으로 성지순례를 간다는 것’은 생소하게 느껴진다. 일본에 대한 특유의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고, 방사능에 대한 공포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일본에 성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가사키현은 나가사키대교구와 함께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자국의 교회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시도 중이며, 이미 오우라성당을 비롯한 나가사키 일대의 성당들과 천주교 관련 유적들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했다. 아울러 ‘신자 발견’ 150주년인 2015년을 성대히 보내고자 준비 중에 있다.
‘신자 발견’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일본의 신앙 선조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나가사키 순례를 통해 알아보자.
일본 천주교회의 산실, 나가사키
2012년 일본 주교회의 교세통계에 따르면 1억2600만 명이 넘는 일본의 인구 중 천주교 신자는 0.35%에 불과한 44만4000여 명이며, 그나마도 서서히 줄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다른 교구들에 비해 나가사키대교구는 4.373%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나가사키대교구가 일본 천주교회의 싹이 트고 자라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가사키는 일본교회가 체험했던 혹독한 박해의 현장이기도 했다.
유럽이 일본을 침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와 예수회 수사, 신자 26명을 나가사키 니시자카에서 처형했다. 당연히 1614년 천주교 금교령이 내려졌고, 신자들에게는 혹독한 박해가 가해졌다.
박해 속에도 몰래 지킨 신앙
1614년 금교령으로 선교사들은 추방당하고, 성당들은 모두 파괴됐다. 1629년에는 나가사키에서 ‘후미에’를 통해 신자들을 색출해 고문하고 처형했다. 후미에란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을 길거리에 놓고 사람들을 불러서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천주교도를 적발했던 것을 말한다. 은밀하게 천주교 신앙을 믿었던 이들은 차마 신앙의 대상이 새겨진 판을 망설이거나 밟기 전 예를 표하게 마련이었고, 이를 보고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효과적으로 색출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체포된 많은 신자들은 결국 고문을 당하고 순교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에서도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대부분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2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서구 열강들의 문호개방 압박으로 일본은 쇄국정책을 풀었다. 1858년 나가사키 행정관은 ‘후미에’의 중지를 선언했고, 다음 해에는 개신교 선교사가 상륙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가 1863년 요코하마를 거쳐 나가사키에 들어왔고, 1865년 2월 19일 오우라의 외국인 거류지에 성당을 세웠다.
혹독한 박해로 신자들이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한 달 뒤인 3월 17일 일반 구경꾼들과는 다른 무리가 성당을 찾아왔다. 주임 신부는 이들을 성당 안으로 인도했고 그들의 질문 몇 개에 답을 하자 그 중 한 여성이 “우리들의 마음은 당신과 같다. 마리아상은 어디에 있습니까”하며 신부에게 신앙을 표명했다. 사제를 기다리며 7대에 걸쳐 믿음을 지켜온 신자들이 마침내 사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신자 발견’이라 불리는 이 사건 이후 각지에서 몰래 신앙을 지켜온 이들이 사제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한 오우라성당은 건물 자체의 가치도 높아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그 옆에는 신학교로 사용되던 건물이 있으며, 현재는 박해 당시의 유물들이 전시된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는 후미에를 비롯해 박해 당시 고문 방법을 그린 그림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나가사키에서 선교를 하면서 사용했던 도구들도 함께 볼 수 있다.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가며
우리 신앙선조들이 박해를 피해 깊숙한 산 속으로 가 교우촌을 형성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의 신앙선조들은 박해를 피해 섬으로 향했다. 비옥한 농지와 생선이 많이 잡히는 어항 근처는 그 지역사람들이 이미 점령했기 때문에 신자들은 산간벽지의 메마른 토지나 어업이 불편한 해변에 살 수 밖에 없어 가난했지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하며 살았다.
1873년 금교령이 철폐되고 마침내 박해에서 해방돼 신앙의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가장 먼저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성당을 지을 돈이 없어서 근처 사암을 깎아 만든 가시라가시마 성당의 경우에는 재료에 대한 자신이 없어 먼저 사제관을 짓고 가능성을 타진한 후 짓기 시작했다. 이처럼 신자들은 가난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재산과 노동을 바쳐 성당을 세웠고, 일본 국토의 1% 면적에 불과한 나가사키현에는 일본 성당 10% 이상에 해당하는 130여 개의 성당이 설립됐다. 이때 세워진 성당들은 대부분 외국인 신부의 지도 아래 서양 건축기법과 일본인 도편수의 전통적 기술이 조합된 독특한 건축물들이 됐다.
빼어난 경관의 카미고토 성당들
고토는 카미고토(상 고토)와 시모고토(하 고토)로 나뉜다. 비교적 큰 시모고토와는 달리 카미고토는 시골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답고 맑은 바다와 싱그러운 녹음을 선사해주는 산을 바라보면, 순례는 관광이 아니라는 사실도 잠시 잊게 될 정도다. 카미고토의 아름다운 경관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주는 성당들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성당과 성당의 거리가 멀지 않아 그리 고된 작업은 아니다.
놀라운 것은 안내인 하나 없는 성당이지만 와이파이(Wi-Fi)를 이용한 안내가 제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용 안내부터, 성지 소개와 동영상 등을 모두 한국어로 보고 들을 수 있다. 동영상 재생시 들리는 어설픈 발음과 어색한 번역들도 생각 외로 재미있다.
성당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을 찾아볼 수 있다. 꽃집도 없는 시골이라 신자들은 성당 주변에 시기별로 피는 꽃들을 키우고 그 꽃들로 제단 앞을 장식한다고 한다. 사제는 물론 신자들의 수도 많지 않아 3~5개의 성당을 하나의 본당으로 묶어 관리하고 있어 매일 미사는 어렵지만 매 미사 때마다 참례율은 100%에 가깝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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