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교황 재위 23년째인 2001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반포한 교서로서 2000년 대희년 폐막에 즈음하여 주교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보내진 교황 문헌이다. 교황께서는 2000년 대희년을 마감하면서 느껴오는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신랑이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에 몰두하였던 이 해에 교회의 기쁨은 대단히 컸습니다. … 대희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이 은총의 사건을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이 해를 마무리하며 우리는 이 오랜 감사의 말씀을 새로운 기쁨으로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1항)
무릇 사람이 어느 순간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갑자기 선물이 주어졌을 때도 있겠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였던 일이 무사히 잘 마무리되었을 때에 그 기쁨은 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황께서 대희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와 같이 모든 이와 함께 기쁨을 만끽하고 싶으셨던 것은 주님의 은총도 함께 하셨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계획하셨던 일이 생각했던대로 잘 마무리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교황께서는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면서 1994년 발표하셨던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원인으로 ‘화해와 참회’를 강조하신 바 있다. “모든 희년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에 기초한 기쁨, 회개의 기쁨입니다. … 개인이든 공동체든, 회개는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제삼천년기」 32항) 그리고 교황께서는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회개의 정신을 교회 쇄신의 원동력으로 삼으시면서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저는 이 성년 거행을, 교회가 새로운 열정으로 복음화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35년 동안 얼마나 자기 쇄신을 해 왔는지를 성찰해 보는 섭리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2항)
그래서였는지, 교황께서는 대희년 중인 2000년 사순 제1주일 ‘용서의 날’ 강론에서 ‘용서’라는 주제를 강조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저는 이 자비의 해에 교회가 주님께 받은 성덕을 강화하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과거와 현재에 자녀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간청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 우리 모두 용서하고 용서를 청합시다.”(‘용서의 날’ 강론 3항)
교황께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 진리를 빙자하여 행사되기도 하였던 폭력, 이따금 다른 종교인들에게 보였던 불신과 증오의 태도에 대하여 용서를 청합시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죄악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져야할 우리의 책임까지도 고백합시다. …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합시다.”(‘용서의 날’ 강론 4항) 그리고 교황께서는 이 성년(聖年)이 화해의 때와 구원의 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면서 강론을 마치셨다.
물론 교황께서 이러한 주제로 강론을 하시게 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제삼천년기」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을 요청하신 데에 따라 보편 교회는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며 자기 성찰을 철저히 시도하였고, 그에 대한 결실로 문헌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교황께서도 강론 중에 국제신학위원회가 몇 달 전에 발표한 문서를 언급하셨고, 이러한 노력을 마무리 하는 차원에서 ‘용서의 날’ 강론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국제신학위원회는 2000년 대희년을 경축하자는 취지에서 1998년에서 1999년까지 ‘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는 주제로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나온 내용을 신앙교리성 장관의 허가를 받아 1999년 12월에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표하였다. 국제신학위원회는 문서의 서론에서 1998년 11월 29일에 발표된 2000년 대희년 칙서인 「강생의 신비」(Incarnationis Mysterium)에 나오는 중요한 주제인 ‘기억의 정화’를 모티브로 하여 작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문서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인정과 관련하여 ‘기억의 정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하여 신학적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 따라서 이 문서의 목적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을 조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대한 참회의 바탕이 되는 전제들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다.”(「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 서론)
국제신학위원회가 문서에서 밝힌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회개 행위의 도덕적 식별이다. 문서는 식별을 위한 도덕적 기준들로 양심의 원리와 사실성의 원리 그리고 ‘패러다임 변화’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와 함께 교회가 성찰해야 하는 주제로 그리스도인의 분열, 진리를 위한 폭력의 행사,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엄중한 오늘날의 잘못은 종교적 무관심, 생명 의식 결여, 세속주의 풍조, 윤리적 상대주의, 태아의 생명권 부인,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관심 등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는 반드시 이와 같은 죄악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성찰은 국제신학위원회가 교황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교황께서는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이와 같은 주제를 이미 언급하셨다. “그리스도교의 제2천년기가 그 끝에 이르면서, 교회는 자기 자녀들의 죄과를 더욱 철저하게 의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가치에 영감을 받은 삶을 세상에 증언하기는커녕, 참으로 반증거와 추문의 형태를 보이는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에 빠져 들어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의 정신에서 벗어났던 역사의 모든 시대를 그 자녀들에게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제삼천년기」 33항) 어쩌면 교황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교황 즉위 때부터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교황께서는 재위 2년 차인 1979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 판결을 재고할 것을 권고하여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결국 가톨릭교회는 1992년에 ‘당시 조치가 비극적인 상호 이해 부족에서 나온 실수였다’고 고백하면서 교회 법정의 오류를 인정한 바 있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또 다른 것을 준비하는 일이다. 교황께서는 교서 「새 천년기」에서 우리의 시선이 미래를 향하기를 권고하였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희년을 과거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삼아 다가오는 새 천년기를 전망하였습니다.”(3항) 즉,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과거에 대한 회상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를 철저히 반성하는 것은 미래에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의 여정을 걸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마도 교황께서는 우리가 지난 이천년보다 더 나은 새 천년을 맞이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교서 서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언급하신 초대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오늘 우리에게 들려 오는 이 말씀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열심히 살며 신뢰를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1항)
전영준 신부는 1991년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교황청립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영성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