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하면서도 색다른 모습들
카미고토와 시모고토의 성당들을 순례하다보면 우리나라의 오래된 공소들을 순례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종종 받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볼 수 있었던 공소의 모습들은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고, 성당 뒤쪽이 아닌 제대 옆쪽에 마련된 고해소는 젊은이들에게는 신기함을 어르신들에게는 반가움을 가져다 준다. 또한 역대 주임 신부들의 사진들을 보면서 익숙하고도 재미있는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반면 미사 시간을 알리는 소라 나팔과 조개로 된 성수대 등 일본 신앙선조들의 삶이 담긴 유물들과 이들 성당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동백꽃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색다른 느낌이 들게 한다. 본래 동백꽃은 다섯 장의 잎으로 돼 있으나 고토 지역 신자들은 네 장으로 줄여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사용하곤 했다.
카미고토에서 시모고토로 향하는 길에 들르는 고린 성당은 두 번의 해체 위기를 넘긴 성당이다. 1881년 설립된 하마와키 성당이 1931년 개축될 때 해체한 자제들을 그대로 고린 지구로 옮겨와 조립한 고린 성당은 이후 노후화와 태풍, 해일에 의한 침수 등을 겪어 다시 해체될 상황에 이르렀으나 섬 안의 불교신도의 조언으로 문화재로 보전됐다. 1985년에 고린 성당 옆에 새 성당을 지어 기존의 성당을 구 고린 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단 두 가정만이 고린 성당에서 3주에 한 번씩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고 있지만, 고린 성당은 앞으로 꾸준히 그 역할을 다 할 것으로 보인다.
‘신자발견’ 이후 고토 지역의 박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독특한 멋을 자랑하는 성당들과는 달리 고토 지역의 박해는 끔찍하고 잔인했다. 신자발견 이후 다시 심해진 천주교 박해로 나가사키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유배됐고, 고토 각지에도 천주교를 금지하고 신자들을 신고하라는 내용의 방이 걸렸다. 그 결과 고토 각지에서 심한 박해가 일어났다. 손발이 묶인 채 바다로 던져지고, 삼각으로 깎은 나무 위에 정좌로 앉혀진 후 무릎 위에 큰 돌을 올려놓는 등 다양한 고문이 행해졌다.
또한 신자 200명을 6평 남짓의 공간에 가두고 8개월동안 아침저녁으로 작은 고구마 한 조각만 주는 만행도 벌어졌다. 발이 땅에 닿지도 않고 선 채로 몸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배고픔과 더러움이 신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고령자와 아이, 젖먹이 등 39명이 세상을 떠났고, 석방된 이후에도 3명이 더 숨을 거뒀다. 이들을 추모하고자 옥터에 건립된 성당이 로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이다. 성당 옆에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비와 함께 사망 원인에 대해 밝히고 있으며, 성당 안에는 바닥에 붉은색으로 당시 신자들이 갇혔던 공간의 크기가 얼마만한지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 끔찍한 박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부모들이 자신들의 몫으로 나온 고구마를 아이들에게 줘서 허기를 달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부모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부모의 복수를 다짐했으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박해자들을 용서하기로 하고 그 아름다운 ‘용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몰래 신앙 지킨 선조들 이야기
고토 지역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유물은 관음상을 닮은 성모상이다. 기나긴 박해로 인해 불교도로 위장할 수밖에 없었던 신자들은 관음상 모습의 성모상을 보며 위안을 얻거나 불상 뒤에 십자가를 새겨 평상시에는 불상으로, 기도할 때는 뒤로 돌려놓아 십자가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그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새긴 조개나 돌멩이를 가지고 다닌다거나 땅바닥에 십자가를 긋고 기도 후에 지우는 등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후미에’를 통한 신자 색출이 잦아지자 신자들은 새 신을 준비해 후미에에 임하고 그 후 그 신을 태워 남은 재를 물에 타 마시기도 했다. 혹은 후미에 전날에 발을 최대한 깨끗이 씻고, 성상의 얼굴을 피해 밟은 후 집에 온 즉시 발을 씻고 그 물을 다 마시고 통회의 기도를 바쳤다고도 한다.
1873년 금교의 방들이 철거되고 신앙의 자유가 선포됐다. 그 해 신자들의 요청으로 선교사가 고토로 파견됐고, 도자키에 방문한 선교사는 12월 24일 밤 해변에서 횃불을 태우며 성탄을 축하했다. 1877년 마루만 신부가 고토지구의 사목을 담당하게 됐으며, 1880년 도자키에 임시 성당을 짓고 세례명부에 적혀있는 신자들을 방문하고, 불행한 아이들의 구제 사업도 시작했다. 지금도 고토에서는 이때 시작한 사회복지사업들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잿더미 속에서 핀 희망의 꽃
신앙의 자유는 얻었지만 나가사키에 큰 비극이 일어났다.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원폭투하지점에서 불과 5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라카미 성당에서 미사를 준비하던 2명의 사제와 24명의 신자가 그 자리에서 숨졌고, 8000여 명의 신자들도 이후 피폭에 따라 전부 사망했다. 성당은 전소됐고, 잿더미 속에서 머리만 남은 성모상이 발견됐다. 현재 우라카미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원폭의 성모님’이 바로 이때 발견된 것이다. 그 외에도 검게 그을린 천사상, 성인상 등도 찾아 볼 수 있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방사능에 대해 무지하던 신자들은 우라카미 성당의 피폭된 벽돌들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벽돌들을 옮겨 구타이노우라 성당의 종루를 만들었다. 자신의 건강이 망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성당에 튼튼한 종루를 만들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을 구타이노우라 성당의 신자들을 생각해보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원폭에서 살아남은 신자들은 그해 12월 24일 기와와 자갈을 파내고 찾은 큰 종을 울리고, 이듬해 12월에는 임시성당을 지었다. 자신들의 절박한 삶보다도 성전을 짓는 것이 더 급했던 것이다. 1959년에는 콘크리트로 새성전을 짓고, 1962년에는 주교좌성당이 됐다.
혹독하면서도 길었던 박해는 일본에 복음이 퍼지는 것을 어렵게 했지만, 그 뿌리마저 해하지는 못했다. 일본의 신앙선조들은 사제도 선교사도 없는 긴 암흑기 속에서도 저마다 담당을 정하고, 전례력을 지키며 신앙을 유지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기도문은 오랜 세월이 흘러 본래의 발음과 멀어지긴 했지만 꾸준히 내려왔다. 곳곳에 남아있는 일본 신앙선조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나가사키는 한국교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주는 일본 천주교회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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