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11일에 열린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았다. 심사대상인 ‘뉴 커런츠’ 분야에는 12편의 영화들이 출품되었는데, 한결같이 아시아권에서 주목받는 신예 감독들의 작품들이었다. 심사위원으로는 필자를 포함해 인도의 아쇼크 레인, 대만의 첸 류수, 독일의 데니스 베터, 그리고 심사위원장으로 헝가리의 게오르기 카르바티가 참여했다. 영화제 기간 중 일주일을 다섯 사람이 인절미처럼 붙어 다니며 영화를 보았고 여러 차례 토론을 거쳐 최우수작으로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What’s time in your world?, 사피 야즈다니안 감독, 극영화, 이란, 2014년, 101분)를 선택했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성격의 ‘사랑’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20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어떻게 변했을까? 파리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골리(레일라 하타미)에게 고향은 낯선 곳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죽었고 옛집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칠이 벗겨졌으며 역에 내려 집으로 가는 방향마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런데 묘한 일이 생긴다. 액자 가게를 운영하는 파르하드(알리 모사파)가 어디선가 나타나 한사코 자신이 골리의 초등학교 동창생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 파르하드는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두 사람의 엇갈린 기억은 영화 내내 도저히 합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기조는 사랑 이야기지만 감독은 ‘기억’에 대해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은 모름지기 장소와 시간과 사람에 대한 기억의 단편들을 갖고 있지만 그 단편들을 합쳐 하나의 완성된 기억을 만들기는 결코 쉽지 않다. 파르하드는 골디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삶에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그는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라 골디 어머니의 말년을 지켰고 그 과정에서 골디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던 까닭이다. 사랑이란 그렇게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찾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할머니가 잘 보아두었던 동네 소년을 나중에 손녀사위로 맞는 일이 허다했다. 할머니의 눈이 그만큼 매섭고 정확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놓고 보니 이란도 우리나라의 풍습과 비슷한 면이 있다.
20년간 고향을 떠나있으면서 골디의 기억은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변한 고향에서 기억의 단편을 그럴 듯하게 완성해내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감독은 왜 골디가 파리에 갔다가 돌아왔는지 일체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그녀가 앞으로 고향에 계속 머무를지에 대해서도 속 시원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시간과 장소를 부지런히 바꿔가며 그녀의 기억을 일깨울 뿐이다. 생략의 묘미를 잘 아는, 신인답지 않은 세련미가 돋보이는 영화였다.
파르하드는 각고의 노력으로 골디의 기억에 다가서려 하지만 매사에 미숙한 탓에 그녀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골디를 향한 그의 사랑이 시들려 한다. 한 때 찬란했던 사랑이 그 빛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관객에게 애틋함만 안겨주더니 감독은 결국 우리를 평온한 길로 이끌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습니다.” 감독이 하는 말을 다섯 명 심사위원 모두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영화제 기간 내내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부산의 율리아나에게 감사를 드린다.
박태식 신부는 서강대 영문과와 종교학과 대학원을 졸업 후 독일 괴팅엔대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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