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교황께서는 신학적 관점이든, 윤리적 관점이든 아니면 시대적으로 떠오르는 중요 주제를 다루는 관점이든 모든 문헌에서 영성적인 숙고를 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하지만 이번 문헌은 문헌 전체를 영성적인 관점에서 서술해 간 거의 유일한 문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총 4장에 걸쳐서 작성된 문헌 안에서 교황께서는 영성적인 성찰과 함께 새로운 천년기의 시작을 맞이하면서 사목적 과제를 던져 주고자 하셨다.
먼저, 첫 번째 장에서 교황께서는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모였던 축제의 시간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식을 비추셨다. “이번 희년은 새 천년기의 시작과 일치함으로써, 분명히 우리에게 천년 왕국의 환상에 젖지 않고 구원 역사의 원대한 지평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5항)
사실 교황께서는 지난 「제삼천년기」에서 이미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천년왕국설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시면서 철저한 준비를 요청하신 바 있었다(참조. 「제삼천년기」 23항). 그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준비 기간 중에 참회의 성찰을 성실하게 수행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정화하고자 대희년은 용서의 요청으로 확연히 특징지어졌습니다.”(6항)
교황께서는 대희년 기간 동안에 있었던 각각의 행사들을 회상하시면서 총평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희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15항) 결국 역사 안에 그리스도와 신비 안에 그리스도를 동시에 직시하여야만 드디어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이 시작되면서 교회의 올바른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장에서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소개하셨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방법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계시의 은총이 필요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관상하는 신비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은총이 이끌어 주는 침묵과 기도의 체험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참조. 20항).
특히 교회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성자의 신원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참조. 21~24항). 말씀이 사람이 되시면서까지 성자께서 자신을 비우셨음을 깨달아야만 역설적으로 고통에 찬 그리스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고통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절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기도인 것이다(참조. 25~26). 그리고 이와 같은 사막 체험은 2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많은 영성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체험되어져 왔다(참조. 27항).
결국 고통에 찬 그리스도의 얼굴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주보게 될 준비가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추억은 부활이 가져다주는 감미로운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이러한 경험에서 힘을 얻은 교회는 오늘 제삼천년기를 시작하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선포하고자 다시 여정을 시작합니다.”(28항)
한편 세 번째 장에서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한 그리스도인이 걸어가게 될 다양한 영적 여정, 즉 “그리스도인 생활의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각 공동체의 상황에 맞는 사목 계획”을 마련할 것을 당부하셨다(29항).
문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거룩함에로의 보편적인 부르심’의 정신에 따라 첫 번째 사목 계획으로 성덕을 제시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숭고한 보통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시 한 번 온 마음으로 강조할 때가 왔습니다.”(31항)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성화를 위하여 각자 ‘성덕의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성덕의 훈련은 아주 특별한 어떤 것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그리스도인이 잘 알고 있는 보통의 방법을 통해서 실천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의 실천, 성찬례의 참여,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로 회귀 등이 성덕의 훈련을 위한 통상적이면서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참조. 32~37항).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성화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참조. 38항).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새롭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러한 성덕과 기도의 으뜸가는 중요성은 물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39항) 그러므로 성화의 완성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뿐만 아니라 ‘말씀의 봉사자’가 되어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에 있다고 문헌은 강조하였다(39~41항).
마지막으로 네 번째 장에서 교황께서는 새로운 천년기에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과제로 ‘친교의 영성’을 언급하셨다(참조. 43항). 특히, “친교는 모든 교회 생활 구조 안에서 날마다 모든 차원에서 개발되고 확대되어야”한다는 것이다(45항). 즉, 다양한 신분의 하느님 백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단체들도 교회와 조화를 이루며 친교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참조. 46항). 또한 교회 안에 갈라진 형제들도 함께 친교를 이룰 수 있도록 대화를 촉진하여야 한다(참조. 48항).
그런데 교황께서는 친교의 본질은 결국 사랑이라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우리 안에서 모든 인간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도록 고무”한다는 것이다(49항).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구체적인 분야에서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청받게 되는데, 그 과제는 바로 생태 위기에 대한 염려, 모든 인간 존재의 생명에 대한 존중을 위한 최첨단 과학 지식의 선용, 교회의 사회 교리, 다른 종교인들과 개방과 대화의 관계 구축 등이다(참조. 50~56항).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6년 10월 이탈리아 아씨시에서 열린 세계 평화 위한 종교 지도자 기도 모임에 참석해 종교 지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CNS 자료사진)
( CNS 자료사진)
교황께서는 이 문헌을 끝마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저는 교회에 대희년 준비의 한 방법으로 공의회의 가르침을 얼마만큼 받아들였는지에 대하여 성찰해 보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공의회 문헌들은 그 가치나 광채가 전혀 퇴색되지 않았습니다.”(57항)
비록 이 문헌의 제목은 ‘새 천년기’였지만,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에는 사실 새로운 것은 없다. 교회 역사 안에서 기존에 배워서 알던 것들만이라도 잘 실천한다면 새로운 천년기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훌륭히 살아갈 수 있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
즉, 과거에 대해서 충분히 참회하는 성찰을 하고, 현재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열심히 실천한다면, 미래에 우리 모두는 구원의 은총을 받고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하는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가야 할 친교의 영성이다. “희년의 폐막과 함께 희망의 미래가 밝아 오는 이 때, 온 교회의 찬미와 감사 기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다다르기를 빕니다.”(59항) 아멘!
전영준 신부는 1991년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교황청립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영성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