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엑소더스’, 1952~1966, 유채, 130×162cm, 개인소장.
▲ 마르크 샤갈
이번 글에서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성경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엑소더스’(L’Edoxus)를 소개하고자 한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는 약속된 땅으로 백성을 이끄는 모세가 십계명 판을 들고 있는 자세로 표현되었고, 어린아이를 안은 여인, 희생제물을 바치려는 사람, 두 손을 올려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 촛불을 든 사람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전통적인 ‘이집트 탈출’ 그림과 다른 점이 많다. 우선 그림의 주인공이 모세가 아니라는 점이다. 모세는 화면 구석에 작게 그려졌을 뿐이고, 큰 무리를 이루는 사람들의 모습이 화면 전체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또한 화면 상단에 커다랗게 그려진,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도 보는 이에게 놀라움을 주고 있다. 홍해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집트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신 화면 왼쪽 윗부분에는 물에 빠져 떠내려오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졌으며, 그 아래쪽으로는 불타는 집들과 눈길위에 쓰러진 말이 있다. 한편 화면 오른쪽 윗부분에는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샤갈이 사랑하던 아내 벨라가 있고, 닭과 염소 등 샤갈이 즐겨 그리던 친근한 짐승들도 보인다. 이 작품은, 파라오와 이집트 군사들을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다는 긴장감 넘치는 기쁨을 표현하던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매우 어두운 분위기가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인데,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도 한밤중인 듯 모두가 어둠에 싸여있다. 대체 샤갈은 무엇을 그리려 했던 것일까?
1차 세계대전에 이은 러시아의 공산혁명을 피해 프랑스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피해 가야 했던 샤갈에게 ‘이집트 탈출’이라는 성경의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치즘이 세력을 넓혀가면서 샤갈의 삶이 위태로워짐에 따라, 그의 작품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며 유대인 대량학살 사건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형태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작품에서 불타는 집들은 전쟁을 의미하며, 물에 빠진 여인은 1947년 ‘엑소더스’호를 타고 탈출하려던 유대인들을 다시 되돌려 보낸 추악한 사건을 암시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샤갈은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빌어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추구라는 주제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그리스도교적 모티프를 작품 속에 그려 넣었는데, 이는 러시아 출신 유대인으로서 유럽과 미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면서 작품세계를 넓혀간 그의 삶에 기인한다. 특히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알게 된 가톨릭 문인과 학자들의 영향이 크다. 유대교 사상과 엄격한 하시디즘, 러시아 민속과 프랑스 모더니즘,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상이 조화를 이룬 그의 작품은, 과거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또한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은 독특한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조수정씨는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