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교회 매체에 소개된 사연. 27년차 ㅂ 신부가 안식년에 1개월간 고속도로 휴게소 환경미화원으로 취업했다. 신자들이 어떻게 돈을 벌어 살림을 하고 교무금을 내는지 알고 싶다며 자청한 일이었다. 손님들은 쓰레기를 대신 버려달라며 차창 밖으로 팔만 쑥 내미는 등 그를 하인처럼 부렸다. 트럭 뒤에 숨어 눈물 젖은 호두과자를 삼키며 그는 ‘본당에 돌아가면 신자들을 위로하는 강론을 하리라’고 다짐했다. 이 이야기는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입소문으로 전해 내려온다.
사무직 노동자들이 주인공인 드라마 ‘미생’(tvN) 열풍이 대단하다. 대중문화 기사와 SNS에 자주 언급되고, 직장인들의 대화에도 빠지지 않는다. 직장인들은 드라마가 원작에 충실하고 자신들의 일상을 현실에 가깝게 보여준다며 환영하고, 외국 거주자와 학생들은 한국 기업이 다 저렇게 살벌하냐며 놀란다.
‘미생’ 속 인물들의 삶은 가엾기 그지없다. 상사의 무리한 요구에 맞춰 준비한 기획안은 더 높은 상사의 한마디에 폐기된다. 학창시절에 무시하던 동창은 거래처의 ‘갑’이 되어 나를 골탕먹인다. 쓰린 속을 술로 달랜 대가는 숙취뿐이고, 과음과 과로에 망가진 건강은 알아서 추슬러야 한다. 바늘구멍 취업문을 뚫고 입사해서 커피, 문서 복사 심부름을 하노라면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나 싶지만, 잡무 없는 직장생활이란 애초에 없다.
드라마의 한계는 분명하다. 과로를 강요하는 무한경쟁, 가족간 단절을 조장하는 기업문화를 드라마는 그저 보여주고, 등장인물들은 정해진 질서에 순응할 뿐이다. 열심히 일해도 살림이 나아지지 않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드라마 몇 편이 바꾸지 못한다는 건 시청자가 더 잘 안다. 그러나 직장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노동이 본인의 명예와 가족의 생계가 걸린 일이고, 평범한 회사원들도 실은 나름의 지식과 경험과 안목을 가진 전문가임을 드라마가 인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위로가 된다. 전쟁 같은 에피소드의 말미에 슬쩍 끼어드는 직장 상사들의 인정 어린 가르침, 바둑의 수에 빗댄 인간관계 강의는 덤이다.
ㅂ 신부의 짧은 체험담이 오래 기억된 까닭은 신자들을 이해하려 애쓴 진심에 있었다. 굳이 현장체험까지 하지 않더라도, 사제들이 평범한 신자들을 자주 만나고 대화한다면 신자들이 원하는 강론을 준비할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드라마 ‘미생’이 환영받는 비결도 마찬가지다. 스태프들은 실감 나는 묘사를 위해 실제 사무실의 구조와 직장인들의 습관, 회사의 업무 서식을 낱낱이 분석했다고 한다. 드라마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보는 이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성실하게 만든 드라마는 적어도 공감과 위로를 선사할 수 있고, 나아가 그들이 사는 세상의 본질을 발견하도록 일깨울 수도 있다. 공감과 위로, 그것은 교회의 백성들이 목자에게 가장 간절히 원하는 선물이기도 하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경향잡지 기자를 거쳐 미디어부에서 언론홍보를 담당한다. 2008년 <매거진T> 비평 공모전에 당선된 뒤 <무비위크>, <10아시아> 등에 TV 비평을 썼고, 2011년에 단행본 <예능은 힘이 세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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