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18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교우들은 언제나 박해의 위험속에서 생활해야만 하였으며, 조정의 박해자들도 여전히 탄압의 강권을 발휘하려하고 있었다. 그동안에도 조선교회에서는 내부적으로 조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고, 제3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Ferreol) 주교와 함께 다블뤼(Daveluy) 신부가 입국하였으며, 김대건(金大建) 신부도 귀국하여 전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846년(憲宗12)에 이르러 조선교회는 김대건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하는 손실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제 또 다른 병오교난(丙午敎難)의 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박해로 말미암아 순교하여 성인이 된사람들은 현석문 까롤로를 비롯한 남녀교우 8명이었다.
성인 현석문 까롤로는 1797년(正祖21)경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미 1801년에 순교한 현계흠(玄啓欽) 베드로가 그의 부친이었으며 기해교난(己亥敎難)으로 순교한 성녀 현경련(玄敬連) 베네딕따가 그의 누님이었다. 또한 그의 아내 김 데레사와 아들 은석도 기해교난때 순교 하였다. 이러한 집안에서 자라난 까롤로는 일찍부터 성교의 진리를 봉행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데 전신을 기울이게 되었다.
조선천주교를 위해 까롤로가 행한 헌신은 그의 행적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앵베르(Imbert) 주교를 영입하기 위하여 중국에 다녀온 일이 있으며, 샤스땅(Cfastan)신부의 복사(服事)로서 신부가 전교활동을 할 때에 항상 수행하면서 보살펴 드렸다. 기해교난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자수하여 신앙을 증거하고자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그를 만류하여 살아 남아서 신자들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이재영(李在永)이라는 가명을 써가며 포졸들의 눈을 피하여 신자들을 돌보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후 앵베르 주교는 체포되어 죽음에 이르렀을 때, 가롤로로 하여금 회장(會長)으로서 목자없는 조선교회를 보살피도록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포졸들에게 쫓기어 초라한 초막이나 산속의 굴에서 생활하면서도 신입교우들을 격려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흩어진 신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교회발전을 위하여 힘쓰도록 하였다. 또한 북경(北京)과의 연락을 다시 맺기 위하여 여러 차례 신자들을 보내기도 하고,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副祭品)을 받고 상해(上海)로 떠날 때에는 안내자로 신부를 모시기도 하였다.
한편 앵베르주교는 생전에 순교자의 행적을 모으는 일을 하였는데 순교하기전에 이일을 까롤로와 그의 누님 베네딕따, 그리고 정하상(丁夏祥)바오로 등에게 맡겼었는바 박해가 끝난 다음에도 까롤로는 이경천(李景千) 요한 최영수(崔榮受)필립보 등과 그 일을 계속하여 마침내「기해일기」라는 순교자의 전기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상해를 다녀온 까롤로는 예전과 같이 교회를 위하여 일하면서 신심생활을 확고히 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김대건신부가 귀국하여 전교를 하다가 체포당하는 병오교난의 수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까롤로는 신부의 체포소식을 듣자 즉시 석정동(石井洞)신부의 집에 거처하던 여교우들을 가마에 태워 갓골에 있는 이간난(李干蘭) 아가타의 집으로 피신시키는 한편 자신은 사포서동(司圃署洞)의 새집으로 가서 숨었다. 그는 이미 그집으로 이사를 하여 돈의 일부분과 여러가지 물건을 옮겨놓았었다. 포졸들은 이러한 사실을 눈치채고는 가마군들을 앞세워 아가타의 집을 찾아내고 거기에 남아있던 우술임(禹述任) 수산나를 앞장 세우고 까롤로가 있는 집을 습격하여 그와 함께 김임이(金任伊)데레사와 정철염(鄭鐵艶)까타리나를 체포하여 포청(捕廳)으로 압송하였다. 이때가 1846년 7월 15일(陰 閏5월22일)이었다.
체포될 당시 까롤로는 까다리나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하나, 그 집에는 동정녀 데레사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으며, 그들과 친한 교우들이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는 점, 훗날 그들이 교리를 실행하여 거룩한 순교에 이르렀다는 점 등으로 볼때 그러한 기록은 외교인들의 추측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포청으로 압송된 까롤로는 옥중생활을 하면서 함께 고생하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어떤 기록에는 그가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나, 당시 국사범(國事犯)으로 지목되어 있던 사실에서 볼 때 곤장(棍杖)을 맞는 등 심한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 정확한 듯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대역죄인(大逆罪人)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새남터의 형장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를 당하였던 것이나, 때는 1846년 9월19일(陰 7월29일)로 그의 나이 5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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