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ㆍ28수복 이후 그나마 서울살이는 유지되려는가 했더니 다시 수도서울을 내주게 되었다.
6ㆍ25때 멋모르고 눌러앉았던 서울 사람들은 다시는 그런 꼴로는 한순간인들 갇혀 살 수 없겠다는 것이 뼈에 새겨진 경험이고 실감이었다.
미회네 집도 기둥뿌리가 빠져나가는 희생을 치뤘다. 좌우익이 한참 날카롭게 대립돼 있던 시절에도 꾸준히 중용만 지켜오던 아버지의 일관성은 이쪽 저쪽에 두루 눈총 맞을 대상이었던지 8ㆍ15 이후에도 줄곧 아무런 정치색채 없는 교육기관에서 행정사무를 보던 이를 잠깐 가자는 말한마디로 노상에서 끌고간 후 결국 종무소식인채 9ㆍ28이된 것이다. 미회네 집이 6ㆍ25를 앉아 치루게 된데에는 당시 서울사람들과 별반 다른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건 아니라 하더라도, 실제로 피난 보따리를 무더기 무더기 싸놓고도 못떠난 것은 미회가 사경을 헤매는 열병의 막바지를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한달 전에 대학생이 된 미회는 애당초 목적하던 학교에 낙방하고 이차시험으로 대학생이 된것인데 그때의 실의가 온통 열기로 뒤덮은 듯 미회는 이승과 저승의 혼매한 경계선을 오락가락거리며 6ㆍ25를 당한 것이다.
미회는 유독 아버지의 편애를 받던 맏딸이다. 아버지는 미회를 놓고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었다.
해방 1년전에 공출성적 부진한 군수로 낙인찍힌데다가 일본인 경찰서장과 설탕배급문제로 한바탕 머리통이 깨어지도록 크게 다룬 아버지는 결국 퇴관을 당하고는 그때부터 두문분출로 집안에만 들어박혀 있었다.
해방이 되자 행정능력이 뛰어나고 비록 일제관리였다고는 해도 동족의 지탄이나 원망을 받지않은 덕망있는 청렴지사라 하여 여러번 군정당국의 권유를 받았으나 한번 들어앉은 근신의 몸이라며 종내 나서지를 않았다.
자연 미회네집 경제사정은 8ㆍ15 이전부터 말이 아니던 것이 8ㆍ15이후에는 더욱 극심해졌다.
아버지는 가까스로 교육기관의 행정사무를 맡아보는 자리에 앉게 되면서 다수 식솔을 그곳 관사에서 모여살 수 있게 마련했다.
그러니까 미회네 가족이 혼자 서울에서 무언가 독자적인 사업을 일으켜 보겠다고 해방이후 줄곧 서울 객지생활을 해오던 아버지와 오랜만에 한지붕 밑에서 오손도손 살게 된 만 1년만에 다시금 이제는 영원히 합칠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속절없니 납치를 당했는데도 곧 불하를 맡게되리라던 미회네가 살던 대학관사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인심이라는 것일게다. 나이 마흔을 갓 넘긴 어머니는 청상과 수댁으로 눈동자 같은 외아들인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빼앗기고는 통탄이 극한에까지 치달리는 동안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도중인 시어머니와 미회를 맏이로 6남매나 되는 조무라기를 거느린 나약한 가장으로 1년동안 행복했던 집을 비워주곤 적산가옥에서 여관업을 하고있던 먼 친척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미회가 혼자 피난을 떠나게 된 것은 모령의 몸으로 서울에 남아서는 안되겠다는 거고 어머니가 서울에 남아 있겠다고 한 것은 실명중인 시어머니와 더불어 그래도 행방모르는 아버지 소식을 어쩌면 들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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