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남경문 베드로는 1806년(純祖6)에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신유교난(辛酉敎難)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까닭에 그에게는 신앙을 전해주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던 그는 20살에 이르러 병이 들었을 때 대세를 받고서야 비로소 입교하게 되었다.
그를 권고하여 입교시킨 사람은 박베드로라는 교우였는데, 그로 인하여 그는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성세를 받았다고 한다.
입교한 수 베드로는 처음에 금위영(禁衛營)의 군인생활을 하다가 후에는 조개젓 장사를 하였으며, 22살에 이르러 허바르바라와 혼인을 하였다. 당시 그는 교리의 자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하여 돈을 빌려 주고 비싼 이자를 받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제(劉方劑)빠치피고 신부로부터 천주교회에서는 그러한 일을 금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즉시 부정하게 취한 이자를 돌려 주고 대금업(貸金業)을 폐하여 버렸다. 그렇게하고 나서 신부가 전교활동을 하러 공소를 순회할 때에 따라다니며 열성적으로 일을 도와 드렸다. 이러한 열성으로 인하여 그는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로부터 회장(會長)으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기해교난(己亥敎難)의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될 뻔하였으나 외교인으로 있던 형제들 덕택으로 수사망을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박해가 그친후 선교사들도 없이 혼자 남아 있게 되자 그는 교리생활을 등한시하여 첩을 두기도하는 등 3년동안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즉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는 지난 몇해동안 방랑하였던 점을 크게 뉘우쳐 다시 훌륭한 생활을 하였으며 항상 친구들에게 순교할 의사를 나타냈다고 한다.
또한 매일 아침 해가 돋기전에 일어나 오랫동안 기도를 하기도하고 보속하는 마음으로 한 겨울에도 불을 때지않고 생활하였다. 비록 그러한 생활로 인하여 몸이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라는 점이 이미 잘 알려져 있었으므로 1846년의 병오교난(丙午敎難)이 일어나자마자 그는 체포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체포는 7월에 이르러 해주감영(海州監營)에서 신문을 받던 임성룡(林成龍)의 밀고에 의해서였다.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여 압송하려할 때 그의 부인이 매달렸으나 그는 죽기를 작정한 사람처럼 아내를 뿌리쳤다고 한다.
포청(捕廳)으로 압송된 베드로는 즉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이때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만나러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 후 음식과 옷을 옥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를 본 베드로는『옥 안에서 얻어 먹는 음식과 지금 입는 옷도 나에게는 너무 과한데 다른 것은 필요없다』고 하며 받기를 거절하였다. 한편 어떤 증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동생이 찾아옴으로써 혹 자신의 마음이 약해지지나 않을까 생각하여 찾아오지 말도록 하였는데, 동생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오자 말도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신문을 받는 중에 베드로는 군인의 패(牌)를 떼어 포장에게 바치며『나는 천주께서 창조하신 물건으로 오늘까지 살아 왔고, 또 나라에서 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순교하는 길밖에 없으니 패를 반납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포장은『네가 배교하기만 한다면 살려줄 뿐만 아니라 네 관직도 잃지 않게 해줄 것이다』라고 하면서회유하였으나 이미 결심이 굳어진 그가 이말을 들을 리는 없었다. 포장은 자신의 말을 듣지않는데 화가 나서 곤장을 치도록 하였는데 어찌나 혼독하게 쳤던지 어깨위에서 곤장이 부러지기도 하였다.
한편 관리들은 베드로의 친구들을 불러다가 그를 유혹하도록 시키기도 하였다. 친구들은 그에게 천주를 배반하고 자유의 몸이 되도록 권하였지만 그는 친구들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그를 권유하기에 지친 친구들은『그토록 친절하고 성실했던 사람이 그렇게 깊이 천주교에 빠져들 줄은 도무지 생각지도 못하였다』고 하며 포기하고 말았다. 또한 관리들이 교우들을 고발하라고 재촉할 때면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리고 관장을 향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야기하였다.
오랫동안 옥중생활을 하면서 베드로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혼독한 형벌을 이겨내었다. 형리들은 이제 그를 배교시킨다는 것을 포기하고는 매로써 죽이고자 하였으며 이에 그를 공중에 매달고는 심하게 매질하였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이러한 매질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때는 1846년 9월20일(음 8월 1일)로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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