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복이후 석달만에 다시 내주게 된 서울을 버리고 장사진으로 이은 피난대열에 끼어들기 달포쯤전에 미회는 생각지도 못한 취직을 하게 됐다.
바야흐로 실명중인 할머니와 갓 스물 미회를 머리로 다섯이나 뒤를 잇는 6남매를 단 방한칸에 밀어넣은 어머니는 친척집의 여관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게다가 자기 아이들의 교육상 문제도 고려하여 절대로 빌려든 방 밖으로 아이들이 나가지 못하게 엄하게 다스렸다.
자연 아이들은 밤에 잠자러 들어가기 전까지 바깥으로 나돌아 다닐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가 학교에 다니는 연령층인데 학교 문은 닫혔으니 딱히 갈 데도 마땅찮은 거리를 늦도록 헤매다녀야만 했다.
미회도 공연히 아침부터 조금씩 불어오르는 도랑물처럼 인파로 깍차는 좁은 충무로 거리를 맥없이 오르내리는 것이 일과였다.
미회는 시골에서 올라온지가 일천했고 전에 대학관사에서 살았을 때는 동숭동에 있는 집과 성동역 옆에 있는 학교 사이 밖에는 오가는 거리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충무로에서 가까운 초동으로 임시주거지가 정해지고 보니 처음 얼맛동안을 서울의 번화가인 충무로 일대에 풍경이 그런대로 눈속에 색달랐다.
어느날 철철 넘쳐나는 도랑물로 불어난 인파속에 끼어 둥둥 떠내려 가노라니 마침 길가에<여사무원 구함>하고 나붙은 구인광고가 제법 규모가 번듯한 도장포 쇼윈도에 나붙어 있었다. 개폐식 출입문 위에 南商會라고 큼직하게 황금빛 옥호가 씌어진 상점이었다.
미회는 별로 개의치않고 문을 밀고 들어가 여사무원이 되려한다고 청하니 상점주인은 종이를 내밀며 무어라고 아무 글자라도 써보라고했다. 미회는 달필로 몇자 적었다. 주인은 미회가 대학생이라고 듣더니 두 말없이 채용해 주었다. 나중에 듣고보니 南商會라는 옥호에는 별다른 뜻이없고 다만 안에서 보나 바깥에서 보나 글자가 똑같이 南商會로 읽히기 때문이라 했다.
남상회는 도장뿐 아니라 명함이나 자그마한 인쇄시설을 갖추고 수입도 제법 쏠쏠한 편이었다. 가게주인은 대학생 여사무원을 채용한 것을 여간 자랑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회는 남자못지 않은데다 사무처리를 잘한다고 가게에 손님이 올적마다 자랑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거리를 비교적 심심치 않게 익혀가는 중인데 피난을 가게 된 것이다. 남상회의 주인과 그 아내는 꼭같이 미회와 함께 피난을 가자며 한사코 그동안 월급도 주지 않았다. 미회어머니는 다 자란 딸을 혼자 피난 보내기도 조심스럽던 차에 차라리 잘됐다며 그들이 미회를 데려가는데 동의했다. 그러자 그들은 미회의 그동안 월급을 두달치로 채워서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렇게 되어서 미회는 만상회집 안주인이 입혀주는 바지를 입고 그집 식구들 틈새에 끼어서 피난을 갔다.
그런데 아직 가게문도 열지 못한 주인 내외는 자주 언쟁을 벌이고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는 일이 많아졌다.
미회는 그 이유가 자기에게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그들 부부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미회에게는 전보다더 다정하게 굴었지만 미회는 더이상 그들 사이에 끼어 있기가 민망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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