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사제가 되어라.”
12월 5일 오후 5시. 원주교구 사제·부제 서품식이 끝나자 김태원 신부(원주 흥업본당 주임)는 막 부제 서품돼 축하세례를 받던 박양업 부제에게 선물보따리를 전했다.
그 자리에서 보따리를 풀어본 박 부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신부가 손수 4개월 동안 공들여 제작해온 옻칠성작과 옻칠성반이 들어있었던 것.
옻칠성작·성반 탄생하기까지
옻칠공예작가로서 다양한 실험적 시도를 해오던 김 신부는 본당출신 새 부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옻칠성작과 옻칠성반을 선물하기로 마음먹고, 알음알음으로 원재료 수배에 나섰다.
김 신부가 수급한 원재료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80여 년 된 원주 옻나무에서 추출한 생칠을 비롯해 느티나무 백골(뼈대를 만들어 놓고 아직 옻칠을 하지 않은 목기), 일본 쿄토산 금분(金粉), 입자가 고운 진흙 등 모두 공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정성어린 재료들이었다.
김 신부는 이 원재료들로 지난 여름동안 본격적으로 옻칠작업에 들어갔지만, 순탄치는 않았다. 건조작업이 단계마다 필요한 옻칠공예 특성상 무더운 여름이라는 작업 여건을 고려해야 했고, 소홀히 할 수 없는 본당사목 때문에라도 개인 시간을 쪼개 작업에 몰두해야 했다.
그렇다고 김 신부가 작업을 허투루 하지는 않았다. 4개월 동안 매일같이 백골 위에 생칠을 바르고 사포로 갈아내며, 새 부제를 위해 기도하고 정성을 쏟았다.
“기도 없이 작업하기란 불가능해요. 주님과 대화하면서 새 부제를 위한 성작과 성반이 실패하지 않기만을 기도했습니다.”
천년을 이어가는 성작·성합
꼭 사제가 되라는 노사제의 염원이 담긴 이 제구들에는 말간 산호빛과 금빛이 돈다. 산호빛을 띠는 이유는 원주지역 옻나무만의 특성 때문이다. 엉겨 붙지 않기로 유명한 일본 교토산 금분은 김 신부의 노하우와 만나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한 빛을 낸다.
1㎜ 두께의 옻칠막을 입은 성작과 성합은 매우 단단한데다, 불에 타지 않고 물에 빠져도 썩지 않는다. 「미사 경본 총지침」 제3표준판에 언급된 거룩한 그릇(성작과 성반)에 대한 교회지침에는 칠보나 자개 같은 귀하고 값진 재료를 쓰되,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재질을 먼저 고르도록 하고 있다. 김 신부는 옻칠로 마감한 목기야말로 최고의 미사제구라고 강조했다.
“칠보와 자개는 깨지기 쉬워요. 나무에 옻칠을 해두면 대기 중에 있는 습기가 침투하지 못해 수천년이 지나도 변형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벽에 던져도 절대 깨지지 않죠. 한 사제가 평생 사용하는 성작과 성합인데, 옻칠해서 만들 가치는 충분한 거죠.”
“꼭 사제가 되겠습니다”
박 부제가 배론성지 대성전 입구에서 옻칠성작과 옻칠성합을 꺼내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떠있던 분위기가 금세 숙연해졌다.
한참 지나서야 감사하다는 말을 이으며 환하게 미소 짓던 박 부제는 “사실 본당 신부님께서 성작·성반을 제작하신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감흥이 별로 없었다”며 “그러나 막상 받고 보니,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성작과 성합을 준비해오신 본당 신부님의 사랑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옻칠성작·성반으로 미사를 집전하는 날을 고대한다는 박 신부의 얼굴엔 기쁨과 설렘이 가득했다.
“꼭 사제가 되겠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