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렌체 한 가운데는 마치 꽃봉오리 형상 같은 아름다운 지붕을 가진 성당이 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은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이라는 뜻이다.
이 성당 바로 앞에는 새날을 상징하는 팔각형 모양의 ‘성 세례자 요한 세례당’이 있다. 이 세례당에는 14~15세기에 만들어진 세 개의 육중한 청동문이 있다. 1330년대에 안드레아 피사노가 만든 남문에는 세례자 요한의 생애가 묘사됐고, 1403~1424년에 로렌조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가 만든 북문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표현됐다. 1425~1452년에 같은 기베르티가 만든 동문에는 구약의 오경과 역사서에 나오는 주요 열 장면이 등장한다.
카인과 아벨, 모세와 율법 등 구약의 주요 열 장면 묘사
기베르티는 세례당의 동문을 완성하기 위해 무려 27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 결과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은 문을 완성하게 됐고 그 문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세례당의 동문은 크게 열 구역으로 나누어졌고 각 구역에는 구약의 주요 장면이 서술적으로 묘사돼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는 이 문을 바라보며 “천국의 문으로서도 손색없다”고 극찬했다. 이 후에 기베르티가 제작한 세례당의 동문은 ‘천국의 문’으로 불리게 됐다.
‘천국의 문’에 장식된 열개의 구역에는 상단으로부터 하단으로 구세사의 내용이 표현돼 있다. ‘아담과 이브의 창조’(창세기 2~3장), ‘카인과 아벨’(창세기 4장), ‘노아와 그의 가족’(창세기 6~9장), ‘아브라함’(창세기 18장, 22장), ‘에사우와 야곱’(창세기 25장, 27장), ‘요셉과 그 형제들’(창세기 37장, 39장), ‘모세와 율법’(탈출기 19-24장),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입성’(여호수아기 3~4장, 6장), ‘다윗과 골리앗’(사무엘 상권 17장, 18장), ‘솔로몬과 스바 여왕’(열왕기 상권 6~7장, 10장).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는 인간의 창조와 원죄, 에덴에서의 추방이 묘사됐다. ‘카인과 아벨’에는 양치는 아벨과 농사짓는 카인, 두 형제의 제사, 카인의 아벨 살해, 카인과 하느님의 대화가 있다. ‘노아와 그의 가족’에는 방주에서 나오는 가족과 동물, 가족 제사, 술 취한 노아와 세 아들이 있다. ‘아브라함’에는 세 천사의 방문, 아브라함의 종들, 이사악 봉헌이 있다. ‘에사우와 야곱’에는 이사악이 에사우를 사냥 보냄, 이사악이 야곱에게 축복해 주는 모습이 있다.
‘요셉과 그 형제들’에는 파라오의 곡식 창고, 은잔 도난 혐의를 받는 베냐민,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힘이 있다. ‘모세와 율법’에는 율법을 받는 모세, 두려움에 떠는 이스라엘 백성이 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입성’에는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계약의 궤를 갈 것 명령, 돌로 제단 쌓는 사람들, 예리고 성벽의 함락이 있다. ‘다윗과 골리앗’에는 사울의 이스라엘 군대 지휘, 다윗이 골리앗 참수, 이스라엘 백성이 적들을 물리침이 있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에는 마차로 도착하는 스바 여왕, 솔로몬의 영접을 받는 여왕, 환호하는 군중, 성전과 왕궁이 있다.
세례성사, 신앙의 성스러운 출발이며 구원 잔치로 초대
기베르티는 구약의 각 장면을 묘사하면서 여러 가지 기법을 다양하게 사용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표현할 때는 고부조나 중부조로 만들어 사람들의 눈에 바로 띄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차적인 것을 드러낼 때는 저부조나 선으로 단순화시켜 후면에 배경으로 배치했다. 그래서 세례당 동문의 조각을 바라보면 원근법을 사용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고 때로는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바로 내 눈 앞에서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하느님 구원을 향해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따라서 세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의 성스러운 출발지점인 것이다. 피렌체에 살던 사람이나 아기들은 성 세례자 요한 세례당에 있는 남문이나 북문으로 들어가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새 신자가 돼 세례당을 나오면서 맨 먼저 통과하며 바라보는 문이 ‘천국의 문’이었을 것이다. 구약의 장엄한 구세사가 묘사된 이 문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받은 세례도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 전체의 구세사와 긴밀히 연관돼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온 인류를 온갖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서 이제 자신의 고단한 삶도 끌어안아 다독거리며 새 날 새 삶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고백했을 것이다.
성 세례자 요한 세례당의 ‘천국의 문’을 나서서 계단 몇 개만 오르면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정문을 거쳐 성당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거룩한 여정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제단을 향하는 성당 내부의 긴 통로는 그리스도인이 한평생 걸어야 할 길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고해성사와 병자성사, 성체성사와 성품성사 등 성사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잔치에 한발 한발 다가간다. 성당의 제단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된다. 천국과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다.
서울대교구 홍보실장 및 성미술 감독을 역임했으며, 홍익대학교에서 미술사학, 영국 뉴캐슬대학교에서 박물관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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