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6~7)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게 이 세상에 오셨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권력이나 중심에서 벗어나 계셨으며, ‘성문 밖’(히브 13,12)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공간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히브 13,8) 가난한 이들의 편이시며, 참벗보호작업장의 근로장애인들과도 가까이 계셨다.
오전 9시30분.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진우리에 위치한 참벗보호작업장(시설장 이현숙 수녀, 이하 작업장)에 통근버스가 도착한다. (재)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인 이곳에는 매일 지적·자폐성 장애인 30명이 출퇴근한다. 이들의 신체연령은 주로 30~40대지만, 지적연령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에 머문다.
일반적인 직업을 갖기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보호된 환경 하에서 근로의 기회와 임금을 지급하고, 개개인에게 적합한 사회적 기능훈련을 통해 자립생활의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이 작업장의 목적이다. 이곳의 작업은 ▲단순 임가공 작업 ▲손에 쥐는 십자가 생산 ▲체험학습장 운영 ▲만나는 방 카페 운영 등으로 진행된다.
꽃차 소믈리에 김시완(루치아)씨의 성탄
“수녀님께 메리크리스마스 선물 주고 싶어요.”
김시완(루치아·29·지적장애2급)씨는 점심식사 후 ‘만나는 방’ 카페를 찾은 참벗보호작업장 시설장 이현숙 수녀에게 성탄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고 물었다. 김씨는 작업장에서 노동하고 얻은 임금으로 직접 성탄선물을 구매해 나눠줄 계획이다. 한달 평균 15만원 정도의 월급이지만 지난 11월 11일에는 빼빼로를 직접 사서 직원들과 친구들 입에 넣어주는 마음씨 착한 친구다. “와서 앉아보라”는 시설장 수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서비스 정신 때문에 그러면 안된다”고 재치 있게 거절한다.
김씨는 카페에서 ‘꽃차 소믈리에’ 역할도 멋지게 해낸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는 힘과 에너지를 주는 붉은색의 맨드라미 꽃차를, 낮에는 차분함을 주는 녹색의 팬지 꽃차를,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에는 보랏빛의 적채차를 권해드립니다.”
‘꽃차 소믈리에’는 꽃차의 재료가 되는 식물의 특성을 파악하며, 제다법을 익혀 꽃차의 색·향·맛을 분별하고 평가하는 전문가다. 참벗보호작업장이 근로장애인에게 전문직업을 제공하고자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직업재활영역 확대 및 수익증대 사업이다. 현재까지 김씨를 포함해 10명이 꽃차 소믈리에 3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지난 12월 5일에는 꽃차 소믈리에 사업을 통해 근로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경기도의회의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김씨는 성탄 전날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말했다. 편지 내용을 물으니 비밀이란다. 비밀로 해줄테니 알려달라는 이 수녀의 꼬드김(?)에 김씨는 귓속말을 건넨다. “천사날개를 달고 싶어요. 날개를 달고 가족에게 날아가 ‘까꿍’하고 싶어요.”
엉뚱하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한 김씨의 입담에 모두가 까르르 웃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났다. 다른 친구들보다 한발 빠르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카페에서 주문을 도운 김씨는 숨돌리기도 전에 작업장으로 달려간다. 작업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임가공 작업
오후 임가공 작업은 성탄시즌에 출시될 캔디류 포장재료에 스티커를 붙이는 일이다. 성탄 전까지 25만 8천 개를 끝내야 납품일에 맞출 수 있다. 현재까지 완료한 수량은 9만 3천 개. 스티커 작업이 급하다보니 ‘손에 쥐는 십자가’와 ‘꽃차 소믈리에’ 작업에 배정된 인력이 투입되고 봉사자들과 주방식구들, 직원들 모두가 발벗고 나섰다.
근로장애인들은 꼼꼼하게 스티커를 붙여나간다. 빠른 손놀림은 아니어도 불량이 발생하면 안 되기 때문에 흐트러짐 없이 각자의 일에 진지하게 몰두한다. 잡담은 금물이다.
“자, 이제 작업 마무리 하겠습니다!”
오늘 마무리한 수량은 1만 5천 개. 앞으 로 약 15만 개가 남았다. 하루에 2만 개를 마쳐야 하는데 오늘 결과가 신통치 않다. 작업속도는 느리더라도 납품일을 지키지 못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묵묵히 작업하고 있던 황정은(32·지체장애1급)씨는 성탄을 기다리며 본인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저는 이 작업을 기쁘게 하고 있어요. 이렇게 모은 돈으로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집이나 옷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성탄이 되길 바라요.”
시간이 날 때마다 작업장을 찾아 봉사를 한다는 정양순(루치아·60·곤지암본당)씨는 “새하얀 눈이 내려 딸과 함께 눈을 밟고 성탄미사에 참례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빌었다.
손에 쥐는 십자가·꽃차 제다작업
임가공 작업이 비상이긴 하지만, ‘손에 쥐는 십자가’ 제작과 ‘꽃차 제다작업’도 어느 정도 진행됐다.
‘손에 쥐는 십자가’는 느티나무 원목으로 만들어 호두기름으로 마감한 제품으로, 근로장애인들이 제작한 수공예 십자가다. 바라보기보다는 느끼기에 알맞도록 고안된 이 십자가는 손에 쥐기 쉽도록 일부러 비뚤어지게 제작됐다. 특히 몸이 아파 다른 기도를 드릴 힘이 없을 때, 손에 쥐고 만지는 느낌을 통해 기도를 봉헌할 수 있다. 시각중심의 성물이 아니라 촉각중심 성물인 셈이다. 특허청에 등록된 이 십자가 제작을 위해 7명의 근로장애인들이 ▲초벌 사포질 ▲재벌 사포질 ▲호두기름칠 ▲건조작업 ▲포장작업 순의 공정을 진행한다.
꽃차 작업장에는 초벌 덖음이 진행 중이다. 동계기간에는 꽃이 피지 않기 때문에 연근, 우엉, 비트 등 뿌리차를 중심으로 제다한다. 오늘은 11월 초에 꽃이 피는 메리골드의 일부를 덖는 작업이 이어졌다. 모든 제다과정은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식히는 ‘구증구포’(九蒸九曝) 방식을 포함한다. 제다과정은 ▲초벌 덖음 ▲재벌 덖음 ▲수분 측정 ▲고온 덖음(가향작업) ▲잠재우기(발효촉진) ▲포장작업 순으로 이어지는데, 덖음작업시 저온과 고온을 구별하지 못하는 근로장애인을 위해 각각 흰색과 적색 테이프로 표시가 돼있다.
꽃차 소믈리에 사업 덕분에 근로장애인의 급여수준은 2014년 11월 기준 15만3천138원에서 20만6천966원으로 136% 상승했다. 내년에는 ‘머리에 좋은 꽃차’ 등 꽃차 브랜딩을 실시하여 사업을 계속 이어나갈 전망이다.
서로가 함께, 서로가 선물이 되어
작업장의 근로장애인들은 얼마 되지 않는 급여에도 기꺼이 나눔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녔다. 지난 7개월 동안 ‘사랑의 동전 모으기’라는 이름으로 이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동전의 총 금액은 9만 600원. 쓰고 남은 돈을 모은 것이 아니라, 덜 쓰고 차곡차곡 모아온 결과다. 이 금액은 오는 12월 17일 영주시 다문화센터에 전달된다.
시설장 이현숙 수녀는 ‘함께 어울려 사는 능력’이야말로 참벗보호작업장이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입사후보들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어울려 생활할 수 있는지 평가를 받습니다. 근로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분들이라도, 여기서는 그분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작업을 만들어 제공해 줍니다.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수녀는 근로장애인들을 ‘선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곳 근로장애인들은 회장, 부회장, 일일반장 등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믿어주고 칭찬해주면 자신감을 얻지요. 여기서는 이들이 주인공입니다. 예수님도 가난한 조건에서 태어나셨고, 늘 이들의 편이었습니다. 이분들을 통해 예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행복을 발견하기도 해요.”
하루 일과가 끝나자 밖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근로장애인들은 눈을 보고 방방 뛰며 통근버스에 오른다. 들뜬 마음을 실은 통근버스가 작업장을 벗어나기까지, 이 수녀는 눈 때문에 걱정하는 표정을 미소로 애써 감추며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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