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게는 꿈이 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국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연극을 만드는 것이 소녀의 꿈이다. 글을 곧잘 쓰는 소녀는 한 발, 한 발 자신의 꿈을 향해 다가간다. 누구보다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성탄을 맞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래를 꿈꾸는 한 소녀를 만났다. 소녀에게 가난과 다문화가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외가인 필리핀에 한 번 가지 못하고 사남매를 위해 헌신하는 엄마를 보면 물러설 수가 없었다. 언제나 직진이었다. 세상의 편견을 이기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아기 예수가 우리 모두에게 선물한 ‘희망’을 찾아본다.
# 나는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박선옥(엘리야·안양대리구 중앙본당)이다. 현재 18살이고,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이다. 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안양엠마우스(센터장 김창해 신부) 선데이아카데미 출신 ‘왕’언니이자 안양예고 첫 다문화가정 학생이다.
“저는 제가 다문화가정에서 자란 것이 자랑스러워요.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잖아요. 다른 다문화가정 아이들도 자신의 환경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물론 선옥양도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거무스름한 피부 때문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다. 고학년이 된 후에는 왕따까지 당했다. “아이들이 ‘너희 나라로 가버려’라고 하기도 하고, 급식 식판에 지우개 가루를 뿌려 못 먹게 했어요. 애들 앞에서는 의연하게 버텼지만 속으로는 참 많이 아팠어요.”
속상한 마음에 필리핀 세부 출신인 엄마에게 모진 말을 던지기도 했고, 검은 피부를 벗겨내고 싶어서 철수세미로 피부를 문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행동으로도 자신을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엄마가 항상 말씀하셨어요.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워하라’고요. 네, 정말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 후로는 더 당당하게 제가 다문화가정 자녀라는 걸 말해요. 그 말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 다문화가정의 희망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학업을 핑계로 성당에서 멀어지는 대부분의 학생과 달리 선옥양은 한 주도 빠짐없이 경기도 안양시에 위치한 가톨릭복지회관을 찾아간다. 그곳에서는 잠시 학생 신분을 놓고 선데이아카데미를 찾아오는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변신한다.
선데이아카데미는 코오롱글로텍 후원, 안양예고 교사와 학생들의 재능기부로,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국어·영어·수학 등 다양한 학과목과 바이올린·통기타·미술 등 예능 과목을 가르쳐주고 있다. 선옥양이 글쓰기에 흥미를 느낀 것도 선데이아카데미를 통해서다.
“저는 이곳에서 안양예고를 알게 됐고, 존경하는 시인이자 스승인 윤한로 선생님을 만났죠. 그리고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다문화가정 자녀도 꿈을 꾸고, 꿈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선데이아카데미의 또 누군가에게 저와 같은 기회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자신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 선옥양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윤한로(미카엘) 선생을 찾아가 선데이아카데미 봉사를 자원했다. 2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선옥양의 열의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열정은 지금도 식지 않았다. 선옥양은 고3이 되는 내년에도 계속 봉사를 이어갈 생각이다.
선데이아카데미에 대한 애정이 컸던 만큼 선옥양은 설거지에 유치부 아이들 돌보기, 청소 등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옥양을 아이들도 잘 따랐다. 더구나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자신만의 확고한 꿈을 키워가는 그를 닮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생겼다. 이현지(12)양은 “누구보다 다정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친절하게 대해주는 언니”라면서 “저도 언니처럼 자기 할 일은 확실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 미래를 꿈꿉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선옥양에게 이번 성탄절은 조금 남다르게 다가온다. 성탄절이면 늘 함께했던 가족들과 이번에도 어김없이 성당에 가고, 미사에 참례한다. 미사 중에는 급성 백혈병으로 투병하고 있는 대모님을 위해 기도할 생각이다. 모든 것이 예년과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선옥양이 이제 곧 고3이 된다는 사실뿐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이라는 단어에 그는 묘한 기분이 든다.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인생의 진로를 선택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긴장되면서도 설렌다.
“목표는 정했어요. 수시에 전력을 다할 테지만 다문화가정 전형으로는 입시를 치루고 싶지 않아요. 같은 학년 친구들과 똑같이 경쟁해서 당당하게 대학에 들어갈 거예요.”
다부진 결심을 전하는 선옥양의 눈빛이 반짝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안양엠마우스 선데이아카데미를 통해 글 쓰는 재미를 느낀 그는 줄곧 작가를 꿈꿨다. 다문화가정 공모전 등 유수의 공모전에 참가해 재능도 인정받았다. 이후 선옥양은 소설가, 시인 등 글 쓰는 직업이란 직업은 다 고민했다. 최근 ‘꽂힌’ 분야는 희곡이다.
‘상자에서 탈출하기’라는 선옥양의 단편소설이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생 언니, 오빠들의 도움으로 제작한 연극 시나리오로 발탁됐고, 얼마 전에는 학교 시극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종이 위의 작은 글씨가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구체적인 연극 콘셉트도 잡아 놓았다. 내 고향과 내 땅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연극을 만들 계획이다. 다문화가정 자녀 역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민이고 일원임을 알리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엄마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제가 하고 싶은 건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문화를 담은 연극을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전 세계를 다니며 순회공연을 할 계획이에요. 우리 사남매를 돌보느라고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고향에 조차 가지 못하는 엄마랑 같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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