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꺼번에 몰아닥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묵상케 하는 계기가 됐다. 민생, 경제살리기 등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세속주의 파도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는 점점 더 쉽지 않다.
숱한 생명들의 아우성이 넘쳐난 올 한해, 한국교회가 걸어온 2014년을 돌아보게 하는 열쇳말은 ‘가난’과 ‘실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걸어간 ‘가난’과 ‘실천’의 길에는 당연하게도 ‘희생’이 따른다. 주님이신 분이 자신마저 내놓는 희생을 하지 않으셨다면 오늘의 세상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고귀한 희생으로 드러나는 사랑이 사그라지고 있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희망이다. 그리스도인이 희망인 것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이 건네주신 진리의 횃불을 꺼트리지 않고 묵묵히 주님의 길을 걸어갈 줄 알기 때문이다. 진리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주님의 길을 넓히기 위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소명을 실천해온 한국교회의 여정을 돌아봄으로써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선물에 다가서길 꿈꿔본다.
세상 속에 선 교회
지난 8월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몸소 보여준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상치 못한 울림을 전해주었다. 가난한 이들과 ‘연대의 확신과 실천이 이루어질 때에 다른 구조적 변화의 길이 열리고 그러한 변화가 가능해진다’(「복음의 기쁨」 제189항)는 교황의 가르침은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변화의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새로남을 향한 실천 속에서 희망의 움을 틔웠다. 교황의 바람대로 한국교회는 고난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모습으로 주님의 자녀임을 드러냈다.
우리 역사를 그 ‘전과 후’로 가를 ‘세월호 참사’는 한국교회에도 일대 분수령이 됐다. 세월호 침몰 직후부터 한국교회는 누구보다 고통에 괴로워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도로 함께하는 것은 물론 희생자를 위한 지원 대책 마련에도 적극 나섰다. 특히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난 안산 단원고가 위치한 수원교구는 물적·영적인 면에서 적극적으로 희생자들을 위한 활동에 나서 나눔의 전범을 세웠다. 광주대교구는 광주가톨릭사회복지회를 중심으로 진도실내체육관에서 밥차를 운영하는가 하면, 가톨릭상장례봉사자회 회원들이 나서 팽목항에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봉사활동을 펼쳤다. 예수의까리따스수녀회, 사랑의씨튼수녀회, 살레시오수녀회 등 각 수도회들도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아픔을 나누는 일에 적극 나섰다.
세월호 특별법이 정치적으로 호도돼 아픔을 더해가는 현실에서 가장 먼저 나선 이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전국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를 필두로 많은 신자들이 서울 광화문 농성장을 찾아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에 함께했다.
정치권의 공방 속에 겉돌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도 교회가 앞장섰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지난 9월 2일 위원회 산하에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활동에 힘을 보탰다. 이어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를 비롯해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장상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등 교회 내 사제, 수도자, 평신도를 망라한 단체들은 10월 13일 서울 정동 프란시스코교육회관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천주교 연석회의’를 연 이후 세월호 진상을 알려나가는데 힘을 모아나가고 있다.
이처럼 고통에 찬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하려는 연대의 모습은 11월 10일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염원하는 천주교 선언’에 13만936명이 동참해 주님의 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의지를 확인시켜주었다. 특히 이 선언에는 15개 교구 사제 1936명을 필두로, 김희중 대주교, 강우일 주교 등 전·현직 주교회의 의장을 비롯해 윤공희 대주교(전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전 광주대교구장), 유흥식 주교(대전교구장), 이기헌 주교(의정부교구장), 권혁주 주교(안동교구장) 등 17명의 주교들이 이름을 올려 교회사에도 새로운 이정표를 아로새겼다.
또, 한국천주교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는 12월 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위로의 미사’를 봉헌하고 이 미사를 시작으로 304일 동안 매일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 아울러 매주 수요일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위로의 미사를 봉헌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 광주대교구 청소년사목국장 김관수 신부 등 교구 사제들이 세월호 침몰 직후 팽목항에서 봉헌된 미사 중 안수기도를 해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누구보다 고통에 아파하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함께하며 물적·영적 지원에 적극 나섰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나선 한국교회 노력은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계기로 더욱 증폭돼 나타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에 ‘인류는 한 가족, 모든 이에게 양식을’ 주제로 국제 카리타스 지구촌 기아 퇴치 캠페인의 개막을 선포, 빈곤으로 고통 받는 모든 이를 향한 관심을 촉구한 바 있다. 한국 카리타스는 이에 발맞춰 해외 원조 주일을 기점으로 앞으로 10년간 국제 카리타스와 연대해, 기아로 죽어가는 이들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힘쓰고자 지구촌 기아퇴치 캠페인 ‘인류는 한 가족, 모든 이에게 양식을!’ 선포식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국 카리타스는 가톨릭신문과 지난 한 해 동안 ‘음식, 쓰레기가 아닙니다’를 주제로 기아퇴치 캠페인을 진행하고, 바자를 열어 수익금으로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무료 아동 급식소를 지원했다.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300번째 조혈모세포 기증자를 맞이해 사랑 나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또, 가톨릭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경제를 실현해나갈 가톨릭사회경제연합 사회적협동조합이 지난 5월 2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첫 발을 내딛었다.
외국인노동자와 이주민 등 이역 땅에서 누구보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야전병원’ 역할을 해온 무료진료소 라파엘클리닉이 17년 만에 처음으로 독립된 공간을 마련한 것도 올 한해 한국교회가 거둔 소중한 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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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여정
한국교회는 꽁꽁 얼어붙은 민족화해의 여정에 새로운 길을 내는데 앞장섰다. 시나브로 민족의 하나됨을 향한 갈망이 사그라지고 있는 가운데 의정부교구는 지난 7월 5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에서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새로운 교두보가 될 민족화해센터를 봉헌했다. 민족화해센터 봉헌은 관할 교구인 의정부교구를 뛰어넘어 한국교회 전체에 통일사목의 새로운 분수령으로 다가오고 있다.
세밑이 다가 온 즈음에 전해진 소식은 민족화해 여정에 반가운 햇살이 되고 있다. 지난 11월 19일 중국 북경에서 만난 남북한 천주교 종교인들은, 분단 70주년이 되는 내년 남과 북 천주교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신앙으로 하나 되는 ‘신앙(기도) 대회’를 열기로 뜻을 모았다. 분단 70주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뤄진 남북 신앙인들의 합의는 2008년 이후 급격히 경색된 남북 관계에 화해와 협력을 모색하는 새로운 교두보가 됐다.
생명·환경 지킴이
밀양 초고압 송전탑 반대로 대변되는 교회의 생태계 보전 노력은 올해도 꾸준히 이어졌다. 10년 가까이 끌어오면서도 존재조차 미미했던 밀양 초고압 송전탑 건설현장에도 그리스도의 빛이 가닿았다. 특히 수도자들의 몸짓이 돋보이는 한해였다. 지난 6월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농성장 강제 철거 과정에서 수녀들은 무차별적인 폭력과 정결을 상징하는 베일을 벗기는 등 견디기 힘든 모멸감 속에서도 밀양 주민들 곁을 지키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심었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은 생명의 고귀함과 환경 보전의 필요성 등을 확산시키는데 이바지했다.
이런 흐름에 힘을 얻어 대구지역 가톨릭, 불교, 개신교, 원불교 등 4대 종단 성직자들은 ‘청도 삼평리 송전탑 사태 해결을 위한 대구경북 종교인회의’를 구성하고 사태 해결에 나서기도 했다.
생명의 청지기로서 교회의 발걸음은 잠시도 멈칫대지 않았다. 양심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버린 생명의 배를 다시 띄운 건 오로지 교회의 공이었다. 흉악 범죄로 인해 사형제도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를 중심으로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 사회에 신선한 생명의 울림을 전해준 생명 이야기콘서트를 대전, 광주 등 지방으로까지 확대해 생명 담론의 확장을 도모하는가 하면, 제19대 국회에서도 사형제도폐지특별법(안)이 발의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