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품없는 외투 주머니에 두손을 찌르고 미회는 맥없이 행길 건널목에 서있었다. 그녀는 방금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터덜터덜 나온 길이다. 갈데가 없어서 들어가 어제도 보았던 재미없는 낡은 삼류양화를 세번씩이 나 연속으로 보고 나오는 길이다. 주머니에 남은 마지막 푼돈을 털어 요기를 할까, 영화를 볼까, 한참 궁리하다가 결국 후자를 택하기로 했었다. 기나긴 하룻해의 시간을 죽이는 장소로는 영화관이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
비좁고 퀴퀴하고 굴속 같은 극장에서 사지가 뒤틀려 더 견딜 수가 없어 나왔는데도 밖이 이렇게 막막할 바에야 그대로 해가 질때까지 버티고 있을걸 잘못했다 싶었다. 몇푼 안되는 푼돈이나마 톡톡 털고나서인지 오늘따라 허기와 외로움과 불안이 유별나게 각박했다. 길바닥에 두다리 내던지고 주저앉아 엉엉 통곡이라도 터뜨리면 속이 좀 후련할까. 하지만 그렇게 소리내어 통곡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초라한 미회가 서있는 앞으로 넋나간듯 새빨갛게 입술을 칠한 비슷한 나이 또래 젊은 여자들이 무어라 소리높이 지껄이며 지나간다. 미회는 잠시 그녀들의 모양 좋은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요즘 유행하는 치렁치
렁 발목께에서 물결치는 플레어스커트가 부러워서가 아니었다.
서로 우연히 얘기라도 나눌수 있는 친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였다.
미회의 눈앞 행길로 질주해가던 지프차에서 누가 고개를 내밀더니『미회야』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미회는 현기증나는 고개를 한차례 세차게 흔들었다. 온세상이 온통 군복입은 남자들로 북적거려도 미회가 알고있는 사람은 그 속에 하나도 끼어있지 않다고 믿고 있는 미회였다.
더구나 군용지프차를 타고 가면서『미회야』하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법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회는 자기가 환청을 들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속력을 내며 달리던 지프차는 그 자리에서 급정거하지는 못하더니 저만큼 떨어진 지점에서 마침내 멎었다.
웬 훤칠한 군복의 사나이가 지프차에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미회야!』
소리를 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나이를 보자 미회는 숨이 넘어갈 듯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도저히 남쪽하늘 밑에서 만날수 있을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할수 없는 사람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반드시 북쪽에 있거나 아니면 이미 죽은 사람으로 밖에 여기지않고 있던 기석오빠가 아닌가.
춘천에서 함께 학교를 다니며 가장 절친한 단짝친구인 기옥의 오빠이므로 미회마저 덩달아 오빠라고 불러오는 기석이가 아닌가.
『기석오빠』
미회도 정신없이 내달아가며 이게 대관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역시 미회 너였구나. 흘깃 지나다보니 아무래도 미회 너같아서 내렸더니…』
『기석오빠, 대관절 어떻게 된일이세요? 군복을 다 입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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