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서 발표 당시 경신성사성 장관 프란시스 아린제 추기경은 교황께서 이 교서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 신앙은 증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한다면서 이 교서가 단순히 성체성사 거행을 강조하고 성체성사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특히 평화 건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를 강조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례 정신의 기본인 ‘믿는 규범(Lex credendi)을 기도하고(Lex orandi), 기도한 바를 생활해야 한다(Lex vivendi)’는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교서라 하겠다.
말씀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묵상해야 함을 교서는 강조한다. “하느님 말씀이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도록, 복음 선포를 신중하게 준비하고 경건하게 귀 기울여 들으며 조용히 묵상하지 않는다면, 성서 구절을 모국어로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교서 13항).
성사의 차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신비 차원에 열려진 마음이 요청됨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말씀으로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식탁에서 ‘빵을 떼어 주시는’ 단순한 행위로도 그분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정신이 빛을 받고 마음이 불타오를 때, 표징들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성체성사는 풍부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담은 표징들의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펼쳐지고, 이러한 표징들을 통하여 그 신비는 어떤 식으로든 믿는 이의 눈앞에 활짝 열리게 된다”(교서 14항). 표징들을 통해서 펼쳐지는 신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신비의 차원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체성사가 ‘식사’라는 본질적인 요소와 이 식사가 ‘희생 제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미사가 희생 제사 ‘기념’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분을 ‘오늘’에 현존하도록 하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미래, 곧 ‘종말’로 우리를 향하게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제대로 성체성사의 신비를 알아보게 된다(교서 15항 참조).
그리스도 현존을 바탕으로 잘 거행되어야 하는 성체성사
성체성사에서 단순한 상징주의를 넘어선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현존의 신비이며, “이를 통하여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완전하게 실현된다.”(교서 16항). 그런데 예수님의 약속이 완전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체성사가 잘 거행되어야 한다. 거룩한 미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샘이며 정점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모든 공동체가 정해진 규범을 따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회중과 성직자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노래나 전례 음악의 거룩한 특성을 살리며 거행되어야 한다(교서 17항 참조). 각 본당 공동체가 ‘미사경본총지침’과 전례주년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며 옛 교부들이 즐겨 하던 ‘신비’교육(Mystagogia)에 전념하여야 한다. 이러한 교육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드러난 신비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데에 도움을 준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서를 통해 성체성사가 그리스도 현존의 신비로서 완전하게 실현되기 위해 무엇보다 성사 거행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한다. 사진은 미사 중 신자들이 영성체 하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성체의 올바른 공경을 방해하는 남용이 있는지 살펴보기
교서는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깊은 존경으로 성체를 대하여야 한다”(18항)고 권고한다. 이 교서가 발표되기 전인 2004년 3월 25일 경신성사성에서 ‘지극히 거룩한 성찬례와 관련하여 준수하거나 회피해야 할 일부 문제들에 관한 훈령’ 「구원의 성사」(Redemptionis Sacramentum)를 발표했다. 공의회 이후 전례쇄신의 그림자인 여러 가지 남용들에 대한 문제들의 심각함을 직시하며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훈령은 말한다. 남용의 문제점은 성체성사에 관한 건전한 신앙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음도 지적하고 있다. “전례의 남용은 이 놀라운 성사에 관한 가톨릭 교리와 건전한 신앙에 혼란이 생기도록 하는 데에 일조한다. 따라서 그러한 남용은 신자들이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겪은 일을 다시 체험하는 데에 장애가 된다”(훈령 6항). 남용의 구체적인 실례와 그에 대한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교령 「구원의 성사」는 모든 성직자들이 읽어보고 혹시 본인들이 자유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사목적 배려라는 차원으로 남용이 없는 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체에 계신 그리스도와 시간보내기
어렸을 적에는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성체 앞에서 조배하는 교우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아이들도 잘 모르면서 따라서 무릎을 꿇고 성체 앞에 있었다. 성당이 학교 가는 도중에 있으면 잠깐이라도 성체조배를 하고 가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성체를 관상하는 습관이 교우들 사이에서 사라지고 있다. 교서는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시간을 가집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믿음과 사랑으로 부주의하고 태만한 행동들을 고쳐 나가고, 우리 구세주께서 세계 도처에서 견디셔야 하는 상처들까지도 치유합시다. 또한 오래되었거나 새로운 수많은 신비주의 체험과 하느님 말씀에 영감을 받은 기도문들에 의지하여,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의 개인적·공동체적인 관상에 깊이를 더해 나갑시다.”(교서 18항)
우리를 떠나지 않고 친교를 맺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우리가 머물러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또한 당신도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이며 친교인가! 어느 드라마의 ‘네 안에 내가 있다’라는 유행어가 혹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시어 당신과의 일치를 이루게 하고 또한 당신께서 직접 성체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이 일치를 끊임없이 증진시킨다. “성찬례의 빵 하나가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한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였듯이,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교서 20항).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드러남인 성체성사에서 또 다른 차원들, 곧 교회의 다양한 역할과 직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교계적 친교와 상호 개방과 애정, 이해와 용서를 촉진하는 ‘친교의 영성’으로 자라나는 형제적 친교도 촉진된다(교서 21항).
교서는 성체성사가 ‘선교’ 원리라고 선포한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심화되는 그리스도의 만남은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증언과 복음화의 절박성을 일깨워주며”(교서 24항)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상황에서 친교와 평화와 연대의 촉진자가 되는 법을 배우게 한다고 말한다. 성체성사는 단순한 구원 표징의 모음이 아니라 현실이며 그리스도의 사명을 지속하게 하는 힘의 원천임을 교서는 천명한다.
윤종식 신부는 의정부교구 소속으로, 1995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교황청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전례학을 가르치면서,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