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류정률 베드로는 평안도 평양군 윤리면 논재골에서 1834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여 짚신삼기같은 노동을 하면서 겨우 겨우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래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괄괄하고 용감한 성격으로 매우 순박하였다.
그가 영세를 하게된 경위는 이덕표라는 친지의 권유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1864년경 함께 열심히 교리를 배웠던 정정규와 함께 서울에 상경하여 장 베르뇌 주교님께 영세를 받았다.
그가 영세를 하고 난후에 너무도 큰 기쁨이 가슴에 넘쳐서 소리치기를『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였노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세한 후에는 그의 생활 태도가 완전히 변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착각 할 정도였다한다.
즉 그의 언사나 행동이 돌변하였고 특히 그동안 심하게 학대하면서 별거생활까지 하였던 아내를 다시 불러서 위로와 사랑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동안에 학대와 매질을 하였던 모든 행동을 참회하였다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이때부터 자기 몸을 채찍질하면서 편태와 고신극기를 그치지 않았고 언제나 고행을 계속하였다.
1866년 병인년이 되자 류정률 베드로는 이상한 영감에서인지 정월 초하룻날에 세배겸 집집마다 친척집을 찾아 다니면서 마지막 고별인사를 하고 다녔기 때문에 듣는 모든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바로 그날 정오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저녁 무렵 공소가 있는 고둔리 마을에 갔다. 그곳에서 그날 전교회장인 정 원선시오와 여러 교우들이 살고 있어서 신년인사의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밤에 유달리 많은 교우들이 원근지방에서 모여와 공소예절을 시작하였고 복음에 대한 강론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포졸 대여섯명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교우들은 당연한 듯이 침착하게 체포되었다. 설날의 준비된 음식을 포졸에게 대접하기도 하였다. 이때 포졸들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교우들중 피할사람은 피하였다. 다음날 아침 날이 새자 그때까지 피하지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유정률을 포승으로 묶으려하자『나는 도망갈 생각이 털끝만치도없는 사람인데 왜 묶으려는가. 내가 앞장서겠다』하면서 그는『오늘에 이르러서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구나』 하면서 기쁨에 넘쳐 평양 감영으로 끌려 갔다. 이때 그와 함께 끌려간 교우들은 정회장과 그의 조카 우세영(알렉시오)등 네사람뿐이었다.
물론 이날의 체포는 중앙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내려온 금교령이 아니었으며 지방관들이 군내외 정세의 혼란한 틈을 타서 공명심을 발하여 천주교 박해로 한몫 보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특히 당시 평양지방은 그런 경향이 농후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체포된 후 3일후에 첫공판이 시작되었다. 평양지방의 1백여명의 양반ㆍ아전ㆍ집장사령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1백 60여명의 군졸을 동원시켜 동헌뜨락을 삼엄하게 에워싸서 약한사람의 가슴을 삼엄하게 해 놓고 이날에는 평양감사 정지용이 직접 심문하였다.
감사가 두목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류정률은『우리들은 두목이란 말을 쓰지 않고 회장이란 말을 쓴다』고 답하였다. 이에 첫번째로 회장인 정 원선시오가 문초중에 수없이 내리치는 곤장으로 끝내 배교하고 말았다. 두번째로 류정률이 불려나가 쉽게 배교시킬수 있다는 감사의 희망을 뒤엎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낭자해 지도록 끝내 버티었다. 이에 류정률을 남겨두고 다음 차례의 교우들은 모두 배교하고 류정률 혼자만 남았다. 감사는 위용이 당당해져서 신자들이 들고 있는 묵주와 고상을 뜯어서 끊어버리게 하고 하느님을 저주하는 말을 하게 하였다. 배교한 교우들은 감사가 시키는대로 했으나 오직 류정률만 감사를 꾸짖었다. 『하느님은 창조주시며 만민의 부모이시다. 제부모를 저주하는 흉악한 짓을 어찌 시키고있는가?』그리고 그는 무서운 눈초리로 배교한 교우들에게『여러분、하느님을 배반하고 저주하다니 이 무슨짓입니까? 당신들도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스와 꼭 같습니다… 아! 진실로 육신이 육신을 잡아 먹으니 슬픈 일입니다』라고 통곡하였다. 이에 감사는 당시 잡혀온 1백여명의 배교자들에게 손에 곤장을 나누어 주어서 류정률을 쳐서 죽이게 하였다. 저마다 제가 살기위해서 류정률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배교자들의 매로 숨지고 말았다.
그리고 평양감사는 배교자들을 시켜서 그의 시신을 대동강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얼마 후에 붉은 피가 물속에서 물위로 번져나가면서 그의 시신은 가라앉지 않고 언제까지나 물위에 둥둥 떠 있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매맞은 자리마다 이상한 광채가 빛났다는 것이다.
그날밤 이 순교자는 아내의 손에 의하여 율리면 하오리 지선산(평양군 율리면 하육리 온점동산)에 안장되었던 것이다. 때는 병인년 2월 17일이며 그의 나이 30여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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