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우스워크 서품수련코스 컨퍼런스 센터 채플.
일상적인 검정 노동 복 위에 긴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는 예수는 그것이 수도사들의 일터가 되었든 심지어 일반 사람들이 일하는 공장이나 도축장, 마구간이든 아니면 주유소나 세차장이든 오랜 노동으로 생긴 팔과 거친 손을 지닌 인간으로 표현되어 있다. 노동하는 한 인간으로 묘사된 이 낯선 예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의 그분임을 알려주는 증거들은 그의 형상이 십자가 위에 있으며 손과 발에 생긴 못 박힌 상처들뿐이다. 성서와 교리를 통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십자가의 예수가 서른셋 노동하는 청년인 것이 왜 이리도 어색해 보이는 것일까?
먼저 우리는 종교미술사에서 ‘노동’을 주제로 다루었던 예를 쉽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로 쓰여진 성서보다 자유로운 서술이 가능한 미술사에서도 대부분의 예수는 노동하는 한 인간보다는 역시 종교적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의 키워드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아마도 성 요셉이었을 것이다. 그는 목수로 알려져 있고 이 때문에 그는 제단화를 비롯한 여러 종교적 작품에서 목공일을 하는 모습으로 자주 재현되었다. 심지어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작품에서는 목공작업을 하는 성 요셉의 일터에 마리아와 예수, 성 요한이 등장하기도 했다.
헤이워드의 작품이 낯선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작품이 ‘청년예수’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라파엘전파의 작품 ‘베드로의 발을 씻기는 예수’(1852~1856)에서 제자의 발을 씻기는 예수는 그 역시 성인(成人)남성의 근육을 가진 노동하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예수를 성서의 일화 속에서 묘사하는 정도가 아닌, 우리들의 일상에서 노동하는 청년의 모습으로 재현한 예는 헤이워드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러한 그의 새로운 시각들이 전통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서 현대적인 이미지를 시도했던 대담함의 원천이 나왔을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젊은 청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노동자 그리스도’는 단순한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수련자들에게는 실천의 삶을 안내하고, 노동의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는 유대와 연대감을, 미생(未生)에서 완생(完生)을 꿈꾸는 젊은 청년에게는 희망 그 자체로 존재할 것이다.
최정선씨는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대에 출강 중이며, 부천 소명여자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