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시끄럽고 어수선했던 2014년 말미에 한 노부부의 다소곳한 사랑이야기가 조용히 극장가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다큐멘터리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관객들의 숫자가 연일 기록을 경신했고, 특히 20~30대 젊은 층의 압도적인 관람률로 이변을 낳은 작품이기도 하다. 강원도 횡성의 산골마을에 76년간 부부라는 인연으로 오누이처럼 살아온 고(故) 조병만 할아버지(98세)와 강계열 할머니(89세)의 이야기다.
죽음의 강에 뛰어드는 남편을 향한 아내의 애타는 심정을 노래한 공무도하가에서 따온 제목처럼, 하얀 눈이 속절없이 쏟아지는 할아버지의 묘 앞에서 흐느끼는 할머니의 울음소리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노부부의 봄날 같은 시절에서 출발한다.
같이 마당을 쓸다가도 낙엽으로 장난을 치고, 들꽃을 서로 머리에 꽂아주며 예쁘다고 좋아하거나 한밤중에 화장실 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할머니를 위해 노래를 부르며 기다려주는 할아버지 모습은 순수하고 예뻐 보이면서도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종일관 서로 존댓말로 예우하고, 어디든지 손을 꼭 잡고 한 걸음씩 내딛는 모습에 배어있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와 공유된 슬픔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작은 불만과 투정으로 티격태격하시는 부모님도 떠올랐는데, 토라짐과 화해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제껏 알게 모르게 서로 돌보고 지탱이 되어준 부모님의 부부로서의 삶에 새삼스런 눈을 뜨게 된 것은 나에게 큰 선물이었다.
봄에 피어난 새순이 여름의 비를 맞으며 성장했다가, 가을을 거쳐 겨울에 져버리는 것이 우리 인생과도 비슷하다는 할아버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누군가와의 관계도 이런 계절을 넘나들고 있지 않은가. 관계는 저절로 성장하지 않는다. 농사를 짓듯이 돌보고 가꾸어야 달콤한 열매를 거둘 수 있고, 때가 되면 그마저도 놓아버리는 순리를 따라야 하지만, 그마저도 아름답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힘은 끝까지 사랑한데서 나온다.
그런 면에서 1년여간 노부부를 관찰한 진모영 감독의 이야기는 무척 교훈적이다. “외출할 때 상대의 신발을 돌려놔주고, 보이지 않는 뒷머리를 다듬어주고, 험한 길에서 손을 잡아주는 행동은 76년 세월 동안 매일 반복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서로 배려하고 지원해준 게 쌓인 결과물이다. 이 부부에게 사랑은 습관이었다.” 이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할머니의 울음이 언젠가 하느님 앞에서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알기 때문이다.(1요한 4,7 참조)
김경희 수녀는 충북대 철학과와 서강대 언론대학원 미디어교육과를 졸업, 서울 수도자 신학원과 수원가톨릭대 등에서 영화 등 대중매체의 사목적 활용 방안을 강의했다. 현재 광주 바오로딸미디어 책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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