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도 사랑으로 ‘함께’ 일하시듯(참조: 19항) 개인이 아닌 교회공동체에도 본분인 애덕 실천을 위해 “공동으로” “조직화”가 필요했다고 강조하신다. 사도들의 직분인 ‘기도’(leitourgia)와 ‘말씀’(lerygma)의 봉사로부터 분리시켜 만든 ‘식탁’의 봉사(diakonia)인 부제 직분은 원래 사회적 봉사만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영적 봉사였다”고도 상기시키신다. 그래서 애덕 실천이야말로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종의 복지활동이 아니라 교회 본질의 일부”이며 “존재를 드러내는 필수적 표현”이라는 것이다.(참조: 20-25항)
가르침 6. 국가와 교회의 상호 연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 부자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면서 가난한 현실의 현상 유지에 악용된다는 마르크스주의식 주장으로 인해 한때 교회의 아가페-카리타스의 활동이 단순한 ‘자선’(eleemosynae)으로 오인된 적도 있다고 지적하신다. 이제는 국가와 교회 간에는 국가가 개인을 전체적으로 직접 통제하면서 관료적으로 체계화하기 보다는 중간 집단인 교회의 활동을 보조하는 ‘보조성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본문에 언급은 없지만 잠깐 설명하자면, 이 원리는 가톨릭 사회교리(social teaching)의 주요 원리 중 하나로서 1931년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40주년」 35항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개념인데, 그 안에서는 세 가지가 강조되었다. 첫째로 사회는 개인의 인격을 존중할 것, 둘째로 큰 단체는 작은 단체를 보호할 것, 셋째로 국가는 개인이든 단체이든 국민을 보조할 것 등이다.
비록 국가가 정의로운 이성의 판단에 따라 공동선의 증진을 추구하지만 그 안에는 특수이해 관계자와 권력으로부터의 부자유스러움이 항상 있다. 그래서 교회는 정치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정화와 윤리교육 그리고 애덕-카리타스 활동을 통해 국가와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러기에 국민으로서의 교회 평신도들도 조직화하고 제도화하여 다른 일반국민들과 공동선의 증진에 있어서 상호 연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저 단순히 곁에서 협력하는 수준이 아니라 직접 책임지는 주체로서 연대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참조: 26-30항)
가르침 7. 교회의 애덕 실천이 지닌 고유성
교황님께서는 애덕 활동을 하는 교회는 “단순히 일반 사회복지기관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신다. 왜냐하면 교회의 애덕 활동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기 때문인데, 그 첫째 원칙은 긴급 요구와 특수 상황에는 “무조건적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구·국가·국제 카리타스 기구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지원함으로써 일반 사회복지기관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나무 무늬는 같아도 그 뿌리가 다르듯이, 외적으로는 ‘같은 모양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는 하지만 그 동기의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이런 활동가들에게는 전문적인 훈련뿐 아니라 “마음의 양성”도 제공해야 한다.(참조: 31항 가))
둘째 원칙은 “당파와 이념 전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고(참조: 31항 나)), 셋째 원칙은 애덕 실천이 “개종 권유”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에 대해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하며 애덕만을 보여주어야 할 때”를 분명히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다.(참조: 31항 다))
▲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애덕 실천이야말로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종의 복지활동이 아니라 교회 본질의 일부이며 존재를 드러내는 필수적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은 2012년 11월 레바논의 한 난민캠프에서 식사를 준비중인 시리아 난민 모습. 【CNS 자료사진】
가르침 8. 주교의 책임 하에 있는 교회의 애덕 실천과 행동 원칙들
교황님께서는 애덕 활동의 참된 주체가 교회 자체라는 것, 보편 교회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황청 사회복지 평의회가 설치되어 있지만 개별 교회에는 “주교”가 첫째 권위자라고 강조하신다. 교회법이 주교에게 “다양한 사도직 활동들을 조정할 책임”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인데, 현실적으로 애덕 실천에 있어서 “긴박한 요구나 특수한 상황”에 처했더라도 개입해야 할 “순서”를 식별해야 할 책임 또한 주교에게 있다는 것이다.(참조: 32항)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해 애덕 실천에 책임 있는 주교가 태만함으로써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실무 책임자가 지녀야 할 마음의 책무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저 ‘주님의 도구’로서 “부여받은 권한 만큼만” 봉사하면 된다는 그런 의미인 것이다. 교황님께서는 끝도 없는 과도한 현실적 요구 앞에서 결코 “낙담할 필요도 없고” 이럴 때일수록 세속주의와 행동주의로 기울어질 유혹에 대항할 “기도”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진다고 가르치신다.(참조: 35-37항)
교황님께서는 더 나아가, 가톨릭 사회복지기구의 실무 책임자들이 세상을 ‘주도적으로’ 개선하려는 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 지역 주교에게 협력해야 한다는 것, 다른 단체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자신이 내어주는 선물 속에 자기 자신을 담아주어야 한다는 것, 등을 제시하신다. 봉사자들은 봉사의 수혜자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 이유는 봉사자 자신이 봉사하면서 동시에 수혜자도 되기 때문이라고 밝히신다.(참조: 33-35항) 그리고 그저 “사랑의 체험”을 하기를 바랄 뿐이시라는 것이다.(참조: 39항)
해설을 마치며
교황님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관점은 다른 교회문헌에서 보다도 독특하게 빛난다. 임신부 엘리사벳에게 하신 석 달 동안의 산후조리 봉사와 그리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여주신 전구(轉求) 봉사 속에서 성모님을 ‘애덕 실천의 주보자’로 제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도자로서 시인으로서 이렇게 마무리 기도를 바치신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저희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소서. 저희를 예수님께 인도해 주소서.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어, 저희도 참된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목마른 세상 한가운데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되게 하소서.》(42항)
필자는 종종 바보 같은 생각을 해본다. 종교·종파 간의 우열은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 교황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 체험’으로 종교·종파 간의 갈등이 극복될 수 있다면, 어느 종교 어느 종파가 그런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 체험이 가능할지 아니 그런 사랑 체험을 해야 할지도 질문거리가 될 것이다. 죽을 때 가장 진솔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인정한다면, 현존하는 주요 종교 창시자들의 마지막 순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천수를 누린 80대 노인 싯다르타의 식중독사(食中毒死)에서인지, 부를 누린 60대 노인 무하마드의 병사(病死)에서일지, 십자가에서의 30대 청년 예수의 잔혹사(殘酷死)에서일지, 이제 그 신봉자들이 스스로 답해야 할 것이다.
이동호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8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로마 라테란대학교 알퐁소대학원에서 윤리신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 오류동본당 주임신부를 맡고 있으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윤리신학 교수,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교육 소위원장으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