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피정의 집. 한국교부학연구회 총무 노성기 신부의 말이 끝나자 회원들 사이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국교부학연구회(회장 장인산 신부)가 제21차 정기모임을 통해 성직자·수도자·평신도들의 영성생활과 사목적·영적 쇄신에 필수적인 ‘대중판 교부문헌 총서’(「그리스도교 원천(가칭)」) 출간계획을 공식 발표하는 자리였다.
지난 1987년부터 분도출판사에서 펴내고 있는 최고 권위의 ‘교부문헌 총서’(라틴어·그리스어 대역본)와 병행될 이 총서는 교부들의 생애를 비롯, 가난·자선·단식 등 신자들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교부문헌(영어·독일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 등 현대어)을 ‘쉬운’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다. ‘교부문헌 총서’가 기초지식을 요한다면, ‘대중판 교부문헌 총서’는 기초지식 없이도 누구나 쉽게 읽어볼 수 있다.
지난해 7월 총서 간행위원회(위원장 노성기 신부)를 꾸린 한국교부학연구회는 이날 정기모임에서 신자들의 영성생활과 신학발전에 이바지할 교부문헌 총 50권을 오는 2018년부터 2027년까지 매년 5권씩 가톨릭출판사에서 펴내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지난 2008년부터 야심차게 시작한 「교부들의 성경주해」(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총서 번역작업이 오는 2017년 종료됨에 따라 차후 사업을 모색하면서 나온 결과다. 총 29권으로 구성된 「교부들의 성경주해」를 통해 성경 연구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한 한국교부학연구회가 후속 과제로 신자들의 실천적 삶과 영성생활을 먼저 고려한 면이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활동은 한국교회의 쇄신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에 본지는 교부들의 풍요로운 신앙유산을 널리 알려온 한국교부학연구회의 발자취와 열매들, 그리고 교회사적 의의를 살펴본다.
■ 한국교부학연구회가 탄생하기까지
2002년 1월 설립, 본격적 활동 시작
방대한 교부들의 신앙유산 연구·소개
성경(聖經)과 성전(聖傳)은 교회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다. 이 가운데 교부들의 가르침은 성전의 근간을 이룬다. 한국교회는 성경연구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으나, 교부문헌 연구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방대한 분량의 교부문헌을 라틴어·그리스어 같은 고전어로 연구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얼마 되지 않는 국내 교부학자들의 고군분투에도 교부들의 가르침은 한국교회에 폭넓게 알려지지 못했다.
한국교부학연구회는 그리스도교의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한편 한국교회에 교부들을 소개하고자 지난 2002년 1월 설립됐다. 한국 교부학의 초석을 놓은 이형우 아빠스(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돼 지난해 초까지 한국교부학연구회를 이끌었다.
국내에 교부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교부문헌을 우리말로 꾸준히 번역해 온 정양모 신부·서공석 신부·함세웅 신부·성염 전 주교황청 대사·정영한 신부 등이 교부학 1세대다. 2세대는 이성효 주교·하성수 박사·노성기 신부·이연학 신부·최원오 교수·이상규 신부 등 1990년대 유럽에서 교부학을 전공한 이들이다. 이어 최근 황인수 신부·안봉환 신부·김현웅 신부·김세빈 신부·강창헌 박사 등 신진 교부학자들이 가세해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들은 매년 정기모임과 학술발표회를 진행하며 교회쇄신과 교회일치에 앞장서고 있다.
▲ 2월 9일부터 1박2일간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열린 한국교부학연구회 제21차 정기모임 참가 회원들이 첫째 날 학술발표회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한국교부학연구회의 열매들
교부학계 걸작 「교부들의 성경주해」
교부학 인명·지명/문헌 용례집 발간
교부들의 가르침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처음으로 부딪힌 장애물은 용어문제였다. 그동안 학자들과 교파별로 교부들의 인명표기는 제각각이었고, 동일인물을 전혀 다른 인물로 오인하는 등 혼란이 잦았다. 한 예로 ‘예로니모’, ‘제롬’, ‘히에로니무스’로 달리 불리는 동일한 교부 인명을 우리말로 통일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한국교부학연구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5년 동안 연구와 공청회 등 의견수렴을 거쳐 마침내 2008년 「교부학 인명·지명 용례집」(분도출판사/648쪽/4만원)을 펴냈다. 신·구교 뿐 아니라 일반 학계에도 통하는 표준통일안으로 평가받는 「교부학 인명·지명 용례집」에는 10세기 이전 교부 시대에 사용된 인명과 지명 등 5000여 개와 관련 지도 40여 컷이 수록됐다. 고전 라틴어를 표제어로 삼고, 영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 표기 용례도 병기한 것이 특징.
「교부학 인명·지명 용례집」의 후속작업으로 한국교부학연구회는 지난 2014년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들의 제목을 통일한 「교부문헌 용례집」(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386쪽/2만3000원)을 잇따라 출간했다. 교부문헌의 제목을 누구나 참조할 수 있게 체계화하고 통일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개신교 교부학자들도 더불어 사용하는 이 두 용례집은 국내 교부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지난 2005년에는 한국적 교부학 입문서인 「내가 사랑한 교부들」(분도출판사/287쪽/1만2000원)을 공동 집필하기도 했지만, 한국교부학연구회의 가장 큰 공헌은 21세기 교부학계의 걸작인 「교부들의 성경주해」 번역작업이다.
신구약 성경 전권과 외경 문헌에 대한 교부들의 해설 가운데 신앙의 정수만 뽑아 우리말로 옮긴 이 방대한 총서는 지난 2008년 「교부들의 성경주해 구약Ⅰ, 창세기 1-11장」 출간을 시작으로 오는 2017년까지 총 29권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총서 덕분에 한국교회는 신앙유산의 보고(寶庫)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든든한 영적 동반자를 얻게 됐다. 아울러 이 총서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통틀어 위기에 빠진 강론과 설교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으며, 신자들과 수도자들의 영성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다.
▲ 교부학연구회 회원들이 함께 저녁기도를 바치고 있다. 개신교 학자들도 포함된 교부학회 회원들은 모임 때마다 전례 안에서 친교와 실천적 일치를 이룬다.
■ ‘교회일치와 학문연구’ 두 마리 토끼
정기모임마다 수도원 전례 안에 친교
개신교 학자들도 동참, 일치 추구
정기모임에는 빠지지 않는 일정이 있다. 성 베네딕도 수도원 저녁기도와 새벽미사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모든 회원들이 참례하며 전례 안에서 친교와 실천적 일치를 이루는 것. 아울러 정기모임의 첫째 날 학술발표회가 끝난 후 회원들은 저녁식사와 애찬(아가페)을 나눈다. 교부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한자리에 모인 참석자들은 밤이 깊도록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고, 어떻게 교부들의 가르침을 교회 내에서 꽃피울 수 있을지 아이디어도 공유한다.
한신대·연세대·장신대 등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개신교 신학도를 비롯하여 개신교 교부학 연구를 주도하는 중견 학자들도 정기모임에 지속적으로 동참하며, 공동으로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유산 연구에 협력하고 있다. 정기모임과 함께 매년 열리는 학술발표회에서도 건조한 토론이나 딱딱한 논리로 서로 다른 교파를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정겹고 가족적인 친교가 흘러넘치는 가운데 이들은 사랑으로 서로 가르치고 배운다. 교회일치와 학문연구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셈이다.
■ 교부(敎父)란?
교부는 레렝의 빈켄티우스가 정의한 네 가지 조건대로, ▲시기적으로 고대에(초기 1~8세기까지, Antiquitas) ▲정통 신앙의 노선에서(Doctrina Orthodoxa) ▲교회가 인정하는 뛰어난 가르침을 펼쳤을 뿐 아니라(Approbatio Ecclesiastica) ▲그 삶의 거룩함도 증언되는 이(Sanctitas Vitae)를 가리킨다.
성인이 되어 신앙에 귀의했고,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수도승 생활을 체험한 사목자이거나 수도승인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