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요한복음은 ‘성전 정화’ 사건을 전합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이 사건을 언급합니다. 공관복음에서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활 후반부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벌어진 일로 소개되지만,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카나에서 첫 번째 표징을 일으키신 후에 일어난 일로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서부터 유다인들과의 갈등을 묘사하고 그 갈등이 점점 더 심화되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성전 정화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이해를 보여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해설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복음서가 부활 이후에 쓰여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고, 단지 예수님의 공생활 때에 일어난 일들을 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 믿음을 통해 그 사건들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당신 몸과 동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복음의 내용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바오로 사도가 이해한 것은 참으로 심오합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다”는 표현을 통해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요약합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세상의 눈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하느님의 지혜로움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사람들을,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누가 보아도 화려하고 놀랄만한 일을 통해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약하고 보잘것없음을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세상은 화려한 것을 쫓고 강한 것을 추구합니다. 마치 ‘강하지 않으면 손해 본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요즘 사람들이 농담처럼 사용하는 ‘갑과 을의 관계’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제1독서인 탈출기에서 전하는 십계명은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십계명은 말 그대로 계명입니다. 지켜야 할 가르침이지만 그 내용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물 수 있는 가르침과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하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에 대한, 가족과 생명에 대한, 개인이 보호받고 타인을 존중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딱딱한 말로 표현되어있지만 그 내용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앙인에겐 두 가지의 축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이웃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우는 것도,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신앙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없이 이웃만을 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한 면이 있다면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채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족하다면 더 기도하고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의 눈과 마음이 그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신앙인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을 찾아가는 것 역시 부활을 잘 준비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99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이태리 로마 성서대학(Pontificio Istituto Biblico) 성서학 석사학위를, 독일 뮌헨 대학(Ludwig-Maximilians-University Munich)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성서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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