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 회사원 김민성(아우구스티노)씨. 지난 명절 귀향길의 아찔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정체 구간을 지나 속도를 내려는 찰라, 방향지시등도 켜지 않고 끼어든 앞차에 화가 치밀어 도로를 가로로 막은 뒤, 차에서 내려 상대 차 운전자와 시비를 하게 됐다. 가족들과 함께였던 터라 싸움은 더 번지지 않았고 고향 가는 길인 탓에 오래 지체는 하지 않았지만 이미 한 차례 멱살잡이를 한 뒤였다.
김씨는 화가 가라앉은 뒤 곰곰 생각해보니, 주먹질이 문제가 아니라 사고라도 났으면 어떻게 했을까 섬뜩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부터 유난히 작은 일에도 화를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수험생 자녀를 둔 박은희(안나·43)씨는 공부하라는 말만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고등학교 2학년 아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밤 늦게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들은 아무리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도 ‘공부’라는 단어만 입에 올리면 책가방은 물론, 먹던 밥그릇도 내던진다. 힘들어서 그러겠거니 생각했지만, 정도가 지나치다.
어느 가정이나 있을 법한 일들이지만 정도와 빈도가 잦아진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분노가 단순히 화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과도한 공격적 태도로 표출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분노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2월 23일 인천에서 한 50대 남성이 동거녀와 그 아들을 흉기로 찌르고, 이웃 주민까지 상해를 입힌 뒤 스스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이틀 뒤인 25일 세종시에서는 편의점 여주인의 옛 동거남이 재산분할 문제에 불만을 품고 3명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다시 이틀 뒤인 27일에는 헤어진 여자친구를 차로 들이받는 사고가 있었다. 앞서 13일에는 서울 강남구의 한 음식점 주인이 음식에 대해 불평하는 손님을 흉기로 33번이나 찔러 살해했다. 24일에는 부산에서 한 선원이 홧김에 시장에 불을 질렀고, 같은 날 서울에서는 주차를 잘못했다고 항의하는 행인을 차 주인이 야구 방망이로 무차별 폭행했다.
사건사고가 다반사이지만 요즘 들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우발적이고 충동적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사건들이 부쩍 늘고 있다. 이처럼 분노 조절을 못하는 이상 징후는 각종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의하면, 분노조절장애 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 수가 지난 2007년 1660명에서 2009년 3015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고, 2013년에는 4934명으로 32.6% 늘어나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정신과 상담을 꺼리는 우리 사회 분위기상 실제로 이 수치는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이상 징후는 이른바 우발적 ‘분노 범죄’가 전체 폭력범죄의 40%에 이른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난해 경찰이 검거한 폭력범 36만6527명 중 15만2249명은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충동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분노조절장애’가 개인에서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는 우려가 근거를 갖는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전문가들은 우선 개인적으로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성장 환경 속에서 자라고 생활한 탓이 크다고 진단한다. 자기욕구 충족을 가장 큰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욕구 충족을 저해하는 방해 요인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충동적 분노를 가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 특유의 고도 경쟁 시스템이 주는 압박감과 스트레스는 개인이 화를 제대로 풀 수 없는 구조를 애당초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분노사회’의 충동조절장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많은 경우 분노조절장애는 개인이나 가정 내에서의 불화가 발단을 이룬다. 하지만 가정이나 사회가 이러한 불화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해소해주지 못할 때, 개인의 일탈 행동은 사회적 문제로 번진다.
김호기 교수(연세대 사회학과)는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불확실성과 불안의 사회 속에서 이런 불확실성이 불안과 불신, 급기야 폭발적인 분노로 이어진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분노하지 않는 세대가 어디 있는가? 2030세대는 청년실업과 구조조정에 분노하고, 4050세대는 퇴출의 공포와 노후 불안에 분노하지 않는가? 6070세대는 지나온 삶이 온당히 평가받지 못한다고 분노를 삭이고 있지 않는가?”
김 교수는 그래서 “누구나 참기 어려운 ‘분노의 사회’야 말로 우리 사회의 현재적 초상”이라고 규정했다.
지난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분노의 촉발은 세월호 참사라는데에 누구나 동의할 것으로 보인다. 비극적 참사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범국민적인 ‘미안함’의 집단우울증 증세는 이후 정부의 대처 과정을 보면서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이어졌다. 한편 여기에 재벌가 2세들의 경박한 행동은 서민들의 ‘공분’을 샀고, 이는 다시 또 ‘집단적 분노’의 양태를 띠었다.
애당초 집단적 불안과 체념, 무기력의 증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난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였다. 최근 나타난 불안 역시 90년대말과 비근한 경제 침체에 바탕을 둔다. 잇달아 발생한 대형 재난사고와 그에 대한 미흡한 대처는 ‘슬픔을 넘어 분노’로 이어졌다.
경기개발연구원 사회경제센터 최석현 연구위원은 ‘분노사회의 진단과 관리전략’이라는 연구보고서를 통해 오늘날의 분노조절장애가 사회적 양극화와 소득 불균형 등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불평등과 양극화, 빈부격차가 지금 사회에서는 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계층화로 고착돼 있다는 인식, 개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넘어설 수 없다는 무력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개인들의 일상적인 불평불만을 극단적이고 충동적인 공격성으로 표출하도록 밀어부친다.
퇴임한 김문조 고려대학교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의 갈등 수렴 용인이 ‘양극화’에서 ‘갑을논쟁’으로 이동했다고 말한다. 이른바 ‘갑질’은 우리 사회 소외계층으로 하여금 극도의 무력감과 스트레스 속에서 언제든지 분노 표출을 하도록 충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해법은 무엇일까?
일상화된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서 개인 차원에서는, 살아가면서 결코 없을 수 없는 분노를 인정하고 적절하게 해소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스트레스 관리는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하다. 취미 활동이나 적절한 상담, 필요한 경우 정신과 치료까지 활용 가능한 방법들을 개인적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가정의 역할은 가장 절실하고 효과적인 부분으로 보인다. 학교와 가정에서의 인성 교육은 근원적인 치유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분노 조절이 사회적으로 실패하고 있다는 인식을 고려할 때, 사회적 제도와 장치를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분노의 촉발이 불공평과 박탈감에 있음을 고려할 때 근원적인 해결책은 정의와 공정의 실현이 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성과주의, 결과주의, 그리고 이를 위한 고도의 경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천적으로 공정하지 않은 경쟁에 대한 깨달음은 개인과 사회를 불안과 분노로 몰게 마련이다.
원론적이고 이념적이 될 수는 있겠으나, 결국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기제는 정의와 공정이 구현되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이상, 공동체 정신의 구현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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