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아픈 과거를 기억합니다. 바로 하느님을 배신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은 역사이고 그 끝은 바빌론 유배라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나게 되었음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킵니다. 물론 역대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때에 유배가 끝나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역대기는 역사를 다루는 책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역사 안에서 벌어지는 하느님의 계획을 다루는 책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유배에서 돌아오는 사건을 말하지만 그 안에서 주는 교훈은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인 임금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백성 모두가 하느님과 함께 있도록 하겠다는 키루스 임금의 칙령은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을 ‘사랑’으로 요약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신 하느님의 뜻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어둠에 속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심판을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요한 복음의 언급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 심판은 종말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은 이 심판이 더 이상 미래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지금’의 결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믿는 이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지금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지금의 결정은 이미 앞으로 있게 될 심판을 판가름하는 기준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에 따라 이미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고, 이미 심판을 받습니다. 요한 복음이 보여주는 이러한 생각은 종말과 심판이 지금과 관련 없이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지금 개인의 결정과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은 그 결정을 요구합니다. 믿음을 결정한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에페소서는 이것을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믿음과 은총과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그렇기에 구원 앞에서 자신의 잘한 것을 따질 수도 또 다른 이들을 향해 자랑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선택 앞에서 자유로운 결정은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는 신앙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세례는 그것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로 마음을 정한 이들은 요한 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미 생명을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의 삶 안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믿음에 맞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 꾸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순시기가 좀 더 적극적으로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것을 통해 생명을 체험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99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이태리 로마 성서대학(Pontificio Istituto Biblico) 성서학 석사학위를, 독일 뮌헨 대학(Ludwig-Maximilians-University Munich)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성서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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