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7년 정부의 강제이주로 용산·청계천·안암동 판자촌 등지에 살던 사람들은 불암산 자락을 깎고 백사마을에 자리 잡았다. 사순시기를 맞아 가톨릭신문은 한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홀로 남겨진 백사마을 주민들의 삶의 자리를 찾았다. 본지는 가난한 이들이 겪는 애환을 전하고, 신앙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생생히 전한다.
■ 쪽방 생일잔치
3월 4일 오전 10시 백사마을 초입. 00미용실, XX철물점 등 간판은 있었지만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10여 분을 걸어도 움직이는 건 강아지 한 마리가 전부였다. 차가운 바람만이 뺨을 때렸다. 백사마을의 겉모습은 꽃샘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한파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마을 안쪽에 다다르자 어떤 할아버지가 연탄재를 들고 집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에게 말 걸기 무섭게 차 한 대가 도착하더니,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중계본동주민복지협의회가 독거 어르신 생신을 축하하고자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 이들은 3월 생일을 맞은 백사마을 어르신의 집을 직접 방문해 반찬과 생필품을 나눠준다고 했다. 생색내기 생일잔치가 아니라, 어르신의 말벗도 되어 드리면서 건강을 확인하고 필요한 물품도 파악한다.
이들이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자 기자도 함께 따라 들어간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허름한 현관문이 보였다. 뻑뻑한 현관문을 열어젖히니 연탄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탄광을 처음 본 기자는 세면장을 보고 연이어 깜짝 놀랐다. 세면장이라 부르기도 난감한 이 공간에는 부피 큰 세탁기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고작 성인 한 사람이 서 있을 정도의 공간뿐. 샤워는 꿈도 못 꿀 것 같았다.
안방은 2평 남짓한 쪽방이었다. 수두룩한 약봉지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김원식(가명·79·서울 중계본동본당) 할아버지는 2년8개월 동안 대상포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왼쪽 가슴 부위가 수시로 아프단다. “빨래와 밥은 혼자 해결하지. 근데 아프면 어쩔 도리가 없어.”
스무 살 되던 해 혼인했던 할아버지는 얼마 못 가 병든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여태 혼자 살았기 때문에 자녀가 없다. 아파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에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졌다.
통증으로 괴로워도 김 할아버지는 꼬박꼬박 성당에 나갔다. 좌절하지 않고 지금껏 견뎌온 원동력이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기자가 귀찮게 질문해도 김 할아버지는 싫은 기색 없이 자상하게 대답했다. 마침 벽에 걸린 십자가도 자상하게 보였다.
이날 생신잔치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상 위에는 치약, 핸드크림, 반찬, 롤케이크, 두유, 미역 등이 올랐다. 생신잔치에 동행했던 김지현(체칠리아·64·서울 중계본동본당)씨가 핸드크림을 직접 손에 발라주니 김 할아버지의 굳은 얼굴이 조금씩 풀어졌다.
‘백사마을 수호천사’로 불리는 김씨는 23년째 매일같이 어르신들 집을 방문해 말벗이 돼주고 청소를 해오고 있다. 김씨는 이날 해수천식(기침을 하면서 숨을 헐떡이며 급하게 몰아 쉬는 것)으로 혼자 밥 해먹기 어려운 박종태(가명·67·서울 중계본동본당)씨 집을 방문한다고 기자에게 귀띔했다. 기자도 김씨 뒤를 따라 나섰다.
▲ 좁은 오르막길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백사마을 전경.
■ 기적의 금연
오르막길 옆에 있는 현관문을 열고 박씨 집에 들어서니 신문지, 재활용품 쓰레기, 약봉지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 퍼뜩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전기장판 위에 앉으세요, 기자 양반. 바닥은 차요.”
전기난로에 불을 붙인 박씨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100m 달리기를 방금 끝낸 사람이 헉헉대며 말하는 듯했다.
박씨는 하루 2갑 이상 담배를 태우던 골초였다. 계단을 오를 때면 숨이 차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 숨을 고르고 나서야 다시 계단에 오를 수 있었다. 평지를 걸을 때도 숨이 금세 차올랐다. 안 되겠다 싶어 6년 전 담배를 끊었다. 불행하게도 금연의 결과는 공황장애와 우울증, 폐쇄공포증 등 금단현상이었다. 그러다 박씨는 기도에 대한 특별한 체험을 했다.
“엊그제 2시간을 엎드려 ‘하느님,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나이다’라는 문장을 되풀이하며 기도했어요.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했죠.”
놀랍게도 2시간 후 담배 생각이 나지 않더란다. 그날 오후 9시 잠자리에 들기 전 담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참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참았다. 그 뒤 지금까지 금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격려의 말을 해줘야 할까, 기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간절히 원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그렇다니까요. 확실히 금연하니까 전보다 숨이 안 차요. 지금까지 말을 이렇게 많이 했는데 말이죠.”
갑자기 찍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쥐다. 헛것을 들었나. 너무나 또렷이 들렸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집 안에 쥐가 다니는지 박씨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다시 집 안을 둘러보니 LPG 가스통 같은 위험한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겨울이 끝나가는 데도 방 입구에 위치한 선풍기는 제 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있었다.
▲ 박종태씨가 어지럽게 널부러진 약봉지를 쳐다보고 있다. 박씨 집에는 LPG 가스통 같은 위험한 물건들을 비롯해 철 지난 선풍기와 신문지, 재활용품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 지독한 외로움
이날 오후 2시30분. 기자가 마을의 꼭대기에 올라가보겠다고 했더니 김지현(체칠리아)씨가 박영자(가명·90·서울 중계본동본당) 할머니 집으로 안내했다.
박 할머니가 머무는 곳은 툇마루가 있는 한 칸짜리 양옥집. 3평 남짓한 공간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집으로 오르는 길은 3m 높이의 콘크리트 계단으로 이뤄져 있고 계단 너머로 마을 어귀까지는 가파른 경사길이라 험난했다. 그나마 평탄한 길로 걸어 다니려면 작은 언덕을 넘어야 한다.
다리가 불편한 데다 백내장 수술 실패로 눈이 ‘뿌옇게’ 보이는 박 할머니는 주로 방 안에서만 활동한다고 했다. 연탄을 때는 박 할머니 집 방바닥은 ‘달동네’란 선입견과 달리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뜨거웠다. 마치 찜질방 같았다. 꽃샘추위가 시작된 이날도 박 할머니는 집 밖으로 나서기 전까지 추위를 알아채지 못했다.
기자가 선물로 건넨 두유를 받아 들고 활짝 웃던 박 할머니는 “같이 먹자”며 재촉했다. 신림동 판자촌에서 살다 할아버지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박 할머니는 하루 종일 혼자 집에 있으면서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 외로움과 친구가 된 듯했다.
숨 막히는 정적과 외로움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박 할머니는 한참을 멍하게 있더니 입을 열었다.
“까막눈이라 책을 보지도 못해. 답답하기만 하지. 그냥 ‘내 탓이오’하면서 사는 거야.”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날이면 박 할머니는 바깥에 나가 건너편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고 했다. 행여 걸어 다니다 넘어질까 멀리 나가지는 못한다. 겨울이 찾아오면서 성당에 나가지 못하게 된 박 할머니는 방 안에서 꾸준히 묵주기도만 바친다고 했다.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기자의 생리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찾은 박 할머니네 화장실은 재래식이었다. 서울에 재래식 화장실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여기서는 시간이 멈춘 게 분명했다.
■ 아름다운 가난의 주름
“아이고 어서 와.”
김씨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최자영(가명·79·서울 중계본동본당) 할머니는 안암동 판잣집에서 살다 47년 전 이곳으로 왔다. 최 할머니는 자녀들을 먹여 살리느라 갖은 고생을 다한 한국 어머니의 전형이었다.
다섯 남매를 둔 최 할머니는 백사마을에서 둘째 아들을 낳고 3일을 굶기도 했다. 본인은 굶어도 갓난아이를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발만 동동 굴렀다고 한다. 그나마 마음씨 좋은 이웃들이 최 할머니에게 북어껍질을 줘서 갓난아이에게 먹일 수 있었다. 기름도 없이 프라이팬에 볶아 갓난아이에게 먹였다.
“그거라도 안 먹였으면 그 애는 죽었을 거야. 아이들 먹여 살리려고 안암동 중부시장에 과일을 팔러 나갔어. 그때 장사해서 하루 쌀 한 되를 받았지. 다른 집 가서 쌀을 얻어오기도 했고.”
최 할머니는 차비가 없어 과일을 머리에 이고 마을에서 시장까지 직접 걸어 다녔다. 집에 도착하면 새벽 1시, 다음 날 아침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그게 가능한가?’ 기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연탄난로 위에서 물 주전자가 몸을 부르르 떤다. 난로 덕분에 집안 공기가 훈훈했다. 최 할머니는 난로에서 멀리 떨어진 안방에는 외풍이 들어온다며 두꺼운 점퍼를 입어야 잘 수 있다고 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가운데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최 할머니 얼굴엔 아름다운 주름이 배어 있었다. 최 할머니와 함께 있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작은 어려움이 닥쳐도 즉시 얼굴을 찌푸리는 오늘날 현대인의 얼굴과는 분명 달랐다.
“저기 무에 바람이 들었는지 까봐. (바람이) 약간 들었어. 어제 내가 조금 먹었거든. 근데 구멍이 송송 난 정도는 아니야.”
최 할머니 말대로 부엌에서 콜라비를 가져와 칼로 잘라본다. 정말로 구멍이 난 정도는 아니었다.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맛이 좋다. 오래 전 시장에서 직접 사온 거라 했다. 이윽고 최 할머니가 방구석에서 홍삼엑기스를 꺼내 기자에게 건넨다. 기자는 다른 건 먹어도 그것만큼은 먹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땅콩을 까먹으며 최 할머니와 함께 TV를 봤다. 연속극에 빠져 있을 즈음, 최 할머니는 갑자기 삼종기도를 바쳐야 한다며 TV 전원을 껐다. 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느님,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주소서.”
마치 어린아이가 기도하듯 최 할머니는 명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기도를 바친다. 가난한 삶의 자리에서 평화로운 주름이 배어 있던 이유를 알 듯했다. 백사마을의 해가 저물고 있었다.
▲ 삼종기도 중인 최자영 할머니. 할머니는 오후 6시가 되자 삼종기도를 바쳐야 한다며 보고 있던 TV를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