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서가 전하는 이 내용을 흔히 ‘새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었던 계명이 돌판에 적힌 것이라면 이제 더 이상 돌판이 아닌 마음에 법을 새겨 주기 때문입니다. 이 새 계약이 주는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옛 계약이 계명을 지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새 계약에서는 죄의 용서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구원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죄의 용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다가온 수난의 내용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을 짐작케 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밀알이 썩어 많은 열매를 맺고, 세상에서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 것이다”는 말씀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희생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아버지 이때를 벗아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이 부분은 공관복음에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기도하셨던 부분입니다(마르 14,35). 결국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고뇌를 겪으셨음을 전해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기도에서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에 하늘에서 응답의 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합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 복음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통해 저자는 두 가지의 사실을 나타냅니다. 시간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은 이미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의 사건처럼 설명됩니다. 하지만 다시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것은 미래의 사건을 지시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다시 일어날, 다시 말하면 미래에 완성되리라는 것은 하느님 구원 역사의 긴장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완성에 이를 구원의 시간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내용적으로 하느님을 이미 영광스럽게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입니다. 지상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다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파견된 사명은 완성될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역설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영광, 고난과 영원한 생명, 심판과 용서.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표현들을 우리는 지속적으로 사순시기 안에서 듣고 묵상합니다. 합리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될 법하지 않은 일들입니다. 하지만 체험 안에서는 가능한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 예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때로 행동하기를, 실천하기를 주저합니다. ‘정말?’이라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전히 제 자리에 선채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한 걸음 내딛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용기는 하느님께서 참되시다는, 약속을 지키신다는 신뢰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례에서 죄를 용서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님의 값진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99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이태리 로마 성서대학(Pontificio Istituto Biblico) 성서학 석사학위를, 독일 뮌헨 대학(Ludwig-Maximilians-University Munich) 성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성서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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