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사마을을 찾은 강진선씨(왼쪽)가 도시락을 배달하고 있다. 서울 중계본동본당 사회복지분과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매주 목요일 독거노인과 어려운 이웃들에게 도시락을 전한다.
■ 따뜻한 나눔의 손길
3월 12일 오전 9시30분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성당. 이른 아침부터 사회복지분과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한다. 매주 목요일은 구역 내 독거노인들과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도시락을 나눠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독거노인들의 상황과 기호에 따라 도시락 반찬이 달라진다. 예컨대 딱딱한 반찬을 먹기 어려운 어르신에게는 견과류 반찬을 제외한다거나,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에 따라 꼭 필요한 반찬을 포함하는 것 등이다.
오전 10시. 회원들이 모여 각자의 구역을 숙지한 뒤 함께 기도한다. 기자는 4개 조 가운데 백사마을로 가는 봉사차량에 올라탔다. 오늘은 도시락 반찬과 쌀을 나눠주는 모양이다.
“어르신들께서 반겨줄 때, 고맙다고 할 때 보람을 느끼죠. 저희가 그분들께 무엇을 해주기보다는 저희가 오히려 그분들로부터 받는 것이 많아요. 저희는 단지 심부름꾼인 셈이죠.”
지난 2006년부터 봉사활동을 이어온 강진선(마리아·55·서울 중계본동본당)씨의 말이다. 그는 부지런히 마을 골목길을 누비며 할당된 10여 가정에 도시락을 전달했다. 기자도 쌀을 들고 부지런히 강씨를 따라다녔다. 그 와중에 폐지와 재활용품으로 뒤덮이다시피 한 허름한 집이 눈에 띄었다. ‘설마 저기에도 사람이 살까.’ 기자의 예상을 뒤엎고 강씨가 그 집 문을 두드리며 크게 외쳤다. “할머니, 계세요?”
▲ 신순이(가명) 할머니가 자신의 집에서 폐지와 빈병 등 재활용품을 분류하고 있다.
■ 수심 가득한 얼굴
뜻밖이었다. 창고인 줄로만 알았던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양쪽 다리를 수술해 잘 걷지 못하는 신순이(가명·86·서울 중계본동본당)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까닭 모를 수심이 얼굴에 가득했다. 폐지와 재활용품을 분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자는 말없이 팔을 걷어붙였다.
소주병 하나 20원. 신 할머니는 열심히 소주병을 골라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빨랫비누도 있었다. 직접 폐식용유로 빨랫비누를 만들어 개당 1000원에 내놓으면 마을주민들이 하나씩 구매한단다. “이것도 안 하면 10원도 못 만져보니 그냥 하는 거야.”
제일 수익이 높은 물건이 뭐냐는 기자의 물음에 신 할머니는 폐지를 골라내며 말했다.
“신문지가 제일 값어치가 있지. 박스는 값어치가 없어. 옷은 비싸게 쳐주고.”
신 할머니 집은 백사마을 초입에 위치한 터라 지나는 마을 주민들이 수시로 인사했다.
“이제 할머니가 다 됐네.” 신 할머니가 앞을 지나는 이웃에게 나지막이 인사를 건넨다.
“병원 갔다 오는 거여. 근데 옆엔 누구여?”
“손주여.”
“손주? 이런 손주가 있었는가. 무슨 아들? 남의 아들 가지고 아들이라고 말하는 거 아녀?”
기자가 설명할 새 없이 신 할머니의 유머가 금세 분위기를 압도한다. 보기완 달리 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둘째 아들이 신흥종교(신천지)에 빠져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신 할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이유를 알 듯했다. 원래는 둘째 아들은 성당에 착실히 다녔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아들과 떨어져 살지만, 둘째 아들은 신 할머니 집을 찾아 수시로 본인의 종교를 강요하곤 했다. 신 할머니가 “그런 소리 하려면 집에 오지 마라”고 으름장을 놓아도 소용없었다.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신 할머니는 한참을 있다 다시 말을 이었다.
“둘째 아들이 말을 안 들어 큰일이야. 어떻게든 잘되라고 기도는 하지. 근데 징그럽게 말을 안 들어.”
소주병을 담은 비닐봉지를 묶던 신 할머니의 얼굴엔 다시 큰 그늘이 드리워졌다.
▲ 현영자 할머니와 식사 중인 기자. 할머니가 직접 구운 김과 중계본동본당 프란치스코회에서 나눠준 도시락 반찬이 상에 올랐다.
■ 백사마을에서 먹고살기
백사마을 초입에는 신 할머니처럼 물건을 파는 상점(?)이 곳곳에 있다. 물론 ‘XX정육점’이란 간판을 그대로 믿고 들어가면 안 된다. 주로 빈집인 경우가 많다. 백사마을 토박이는 잘 알고 있어도 외부 사람들이 보기엔 ‘이곳이 상점인지 집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집이 곳곳에 퍼져있다.
고사리와 숙주나물 등 각종 채소를 팔던 김춘자(가명·82) 할머니도 그랬다. 백사마을에 온지 45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같은 자리에서 채소를 팔았다. 지금은 김 할머니 혼자 먹고살 정도도 팔리지 않는다. 김 할머니는 인근 경동시장에서 사들여온 파를 다듬고 있었다. 2000원에 사온 파를 다듬은 뒤 2500원에 내다 판다. 하루에 5단 팔리면 많이 판단다. 먹고 노느니 하는 셈이다.
큰아들은 천안에 살고 작은아들은 부산에 산단다. 자식들이 보고 싶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 할머니는 주저함 없이 말했다.
“같이 살면 못써, 속상해서. 따로 살아야 해. 무엇하러 자식한테 기대나.”
“자식이 없으면 얼마나 서글픈데. 젊어서는 혼자 살아도 되지만.”
옆에서 묵묵히 파를 다듬고 있던 동료 할머니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자식과 같이 사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쟁에 휩싸인다. 기자는 자리를 뜨려고 살짝 일어났다. 김 할머니가 30m쯤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놓인 파를 이리 가지고 오란다. 김 할머니 심부름을 하고 나서 기자는 마을 꼭대기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 조순이(수산나) 할머니가 고생했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할머니는 당뇨가 심해 4년 전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 걷는 게 소원
“죽기 직전에 치매 걸리면 주변 사람들만 피해 보는 거지, 안 그래?”
조순이(수산나·82·서울 중계본동본당) 할머니는 치매예방을 위해 집에서 자주 퍼즐을 맞추곤 한다. 이번엔 끝내기도 전에 침대에 올랐다. 평소와 달리 어지럽다고 했다.
조 할머니는 당뇨가 심해 4년 전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당뇨 뿐 아니라 심장과 인공관절 수술 등 13차례 수술을 거친 뒤 휠체어 생활 중이다. 조 할머니는 어제저녁부터 왼쪽 다리가 ‘기분 나쁘게’ 아프다며 유난히 눈살을 찌푸렸다.
“또 절단해야 하나. 심상치가 않네.”
왼쪽 다리가 너무 아픈 탓인지 틀니도 빼버렸다. 입맛도 떨어졌단다. 신경은 온통 왼쪽 다리에 가있는 모양이었다. 왼쪽 양말을 벗겨보니 발이 퉁퉁 부었다. 아니 불어있었다.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쑥 들어간다. 왼쪽 발가락 감각은 오래전에 죽었다.
제일 힘든 게 뭐냐는 기자의 물음에 “말하면 뭐해”라며 눈물부터 훔친다. 서른 살 되던 해 할아버지와 함께 서울 삼청동 판잣집에서 백사마을로 거처를 옮긴 조 할머니는 숱한 고생을 참 많이도 했다. 초기엔 할아버지를 도와 시멘트로 벽돌을 만들고 집도 세웠다.
“젊어서 돈 벌러 나갔을 때가 제일 행복했어.”
음식도 잘했다던 조 할머니는 마을 주민들과 음식을 나누는 착한 마음씨를 지녔다. 노래 부르기도 좋아해 유쾌한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지금은 휠체어와 병상에만 누워있으니 고생만 하던 옛 생각이 자꾸 떠올라 서러움에 자꾸 눈물을 적신다.
“걷는 게 소원이야.”
의족을 사용하려고 해도 당뇨가 심해 상처가 생길까봐 엄두를 못 낸다. 한 번이라도 걸어서 밖에 나가는 게 소원이라는 조 할머니는 휠체어에 의지해 집안을 돌아다니는 게 전부다. 게다가 신 할머니 집은 언덕배기에 있어 휠체어를 타고는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
4년 전 화장실에 쓰러져있는 조 할머니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김지현(체칠리아·64·서울 중계본동본당)씨였다. 김씨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한다. “그때부터 할머니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저혈당으로 쓰러진 조 할머니는 며칠 뒤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쓰러질 때 오른쪽 엉덩이뼈에 금이 갔지만 병원에서는 고관절인 줄 알고 퇴원시켰다. 비록 뒤늦게 치료를 했어도 지나온 생활 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지 할머니의 훌쩍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숱한 고생으로 점철된 인생의 굴레에도 좌절하지 않았던 건 신앙 때문이었다. 까막눈이라 할 수 있는 기도가 아침·저녁기도와 묵주기도 뿐. 누구보다도 조 할머니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으면 묵주를 움켜쥔다. 그러면 잠이 들 수 있었다.
조 할머니는 혈액순환이 안 되는 듯 왼쪽 다리를 연신 두드리더니 다시 병상에 눕는다. 훌쩍거림은 멈췄지만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여 있었다.
▲ 현영자 할머니의 기도문. 중계본동본당에서 배포한 기도문과 가톨릭기도서, 임종기도 등이 보인다. 기도서에는 손때가 가득하다.
■ 할머니의 기도
“성당에 가고 싶어!”
현영자(마리아·79·서울 중계본동본당) 할머니의 소녀 같은 칭얼거림에 기자는 깜짝 놀랐다. 겨울이 끝나지 않아 바깥에 나가질 못하니 성당에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현 할머니는 47년 전 백사마을로 이사 왔지만 이곳이 편하다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집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기도해도 들을 사람이 없어서 좋아. 기도를 해도, 아무리 떠들어도 옆집에선 소리가 안 들리거든.”
길에서는 할머니의 기도소리가 조금 들린단다. 그래서 이웃들은 현 할머니의 기도시간을 잘 알고 있다. 보통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아침기도를 바친다. 이어 가톨릭기도서에 있는 기도문을 쭉 바친다. 위령기도, 교황을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 등을 바치고 나면 묵주기도를 봉헌한다. 사순시기에는 오후 3시에 십자가의 길도 바친다. 때에 맞춰 삼종기도도 봉헌한다. 그러다보면 시간이 잘 간다. 기도하다 하루가 다 지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자는 현 할머니와 조촐한 저녁을 먹었다. 현 할머니가 직접 구운 김과 중계본동본당 프란치스코회에서 나눠준 도시락 반찬이 상에 올랐다. 상추를 싸서 맛있게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기자는 연탄난로 위에 커피물을 올렸다.
4년 전 뇌졸중으로 선종한 할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다. 할아버지는 하루 번 돈을 매번 술로 탕진하고 집에 돌아왔단다. 현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가 미웠다. 당시 백사마을에는 남자들이 특별한 직업도 없이 술 마시고 소일하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지난 1980년 할아버지가 돈을 벌러 필리핀으로 갔단다. 할아버지는 필리핀에서 현지 처를 얻고 아들도 낳았다. 8년이 지난 뒤 작은 구멍가게를 필리핀 처에게 남겨주고 할아버지는 한국으로 왔다. 그런 할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현 할머니는 간단한 대답으로 응수했다.
“원망은 뭐, 그까짓 거.”
현 할머니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특별한 체험을 기자에게 들려줬다.
현 할머니는 매일같이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던 할아버지에 대한 정이 뚝 떨어졌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하느님께서 다시 정을 붙여주셨단다.
“똥, 오줌, 가래 등 영감의 모든 게 더럽지 않았어. 석 달 간병하고 돌아가셨지. 하느님께서 정을 붙여주지 않으셨다면 간병 못했을 거야.”
할아버지는 병자성사를 받았다. 할아버지의 세례명은 ‘요셉’. 현 할머니 세례명이 ‘마리아’였기 때문이다. 현 할머니는 그때부터 요셉 할아버지를 비롯해 자녀들과 교회를 위해 기도해왔다. 기도서에는 손때가 가득했다. 마치 성인·성녀들의 유물을 보는 듯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요셉이를 아버지 손에 맡겨 드리오니….”
위령기도문은 이내 노래로 바뀐다. 운율이 실린다. 리듬도 타고 강약도 들어간다.
그토록 아름다운 기도는 그레고리오 성가 다음으로 처음이었다. 글 읽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현 할머니는 멈추지 않고 명랑한 소리로 기도문을 읊었다. 풀벌레가 밤새도록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