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신자들이 드라마를 보다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이 있다. 배경에 성당이 등장할 때다. 드라마 속 성당은 인물이 겪는 중요한 사건이나 심경의 변화를 통해 주제를 강조하는 장치로 애용된다.
드라마 속 성당의 단골 이벤트는 결혼이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조심조심 사랑하던 초로의 커플은 젊은이들의 축복 속에 결합된다(전설의 마녀).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날 암환자 여인은 그녀를 사랑하는 청년과 언약식을 한다(마마). 클로즈업된 성모님과 성인들은 혼인의 증인, 축복의 메신저로 상징된다. 소수정예의 하객들은 두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드라마 속 성당 결혼식은 하느님의 축복과 남녀의 신의가 혼인의 본질임을 확인해 준다.
성당은 위로와 의탁의 공간이기도 하다. 보육원 수녀의 품에 안겨 흐느끼던 고아 소녀는 의사가 되어 병든 수녀를 돌보며 부모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블러드). 음악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연주자들은 낡은 성당에 모여 연습하며 희망을 가꾼다(베토벤 바이러스).
상처받은 주인공들이 성당을 자주 찾는 이유는 뭘까.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건물인데 거리낌 없이 들어갈 곳은 아니어서 신비로운 느낌이 있고, 성미술 작품 속 인물들과 시선을 맞추며 감정이입하기도 좋다. 한 네티즌의 말마따나 “뭔가 조용하고 다 이해해 줄 것 같은 분위기”다. 성당 에피소드가 추구하는 축복과 위로, 자비와 포용의 이미지는 곧 비신자 일반이 천주교회에 갖는 기대일 것이다.
드라마 속 성당은 마음이 뒤틀린 이들을 통해 불편한 진실도 드러낸다. 철부지 커플이 전례가 거행 중인 성당을 급습해 혼인 축복을 청하고(응급남녀), 물욕에 눈먼 여자와 손에 피를 묻힌 남자가 사랑과 신의의 표지로 반지를 교환한다(황금의 제국). 한편의 계략이나 집착으로 이뤄지는 혼인도 있다(제빵왕 김탁구). 교회법대로라면 성립될 리 없는 혼인이다.
어떤 이에게 기도는 저주와 위선의 수단이다. 비운의 여인이 성모상 앞에서 “전남편을 죽이고 지옥 가겠다”고 울부짖는다(아내의 유혹). 믿었던 이의 배신으로 고초를 겪은 청년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성당에서 스스로 심판자가 될 것을 다짐한다(돈의 화신). 비리의 증인을 자동차로 친 뒤 성당에 숨어 떠는 검사에게, 그와 한통속인 후배는 당신 자신을 위해 손을 모으고 눈을 감으라고 일갈한다(펀치).
성당에 거짓과 저주가 깃드는 장면을 보는 마음은 편치 않지만, 배울 점이 없진 않다. 극중 인물의 갈등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반영하기도 하고, 거룩함과 죄악 사이의 갈등이 양심을 환기하는 면도 있어서다. 대부분 파국으로 끝나는 왜곡된 혼인은 혼인을 성사로서 진지하고 충실하게 준비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저주의 이면에 깃든 인간의 고통은 그 고통을 초래한 타인의 죄를 기억하게 한다. 타인의 거짓 기도에 분노하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성찰하게 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경향잡지 기자를 거쳐 미디어부에서 언론홍보를 담당한다. 2008년 <매거진T> 비평 공모전에 당선된 뒤 <무비위크>, <10아시아> 등에 TV 비평을 썼고, 2011년에 단행본 <예능은 힘이 세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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