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처음’을 많이 기억한다. 처음이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지면 그 처음에 대한 기억은 점점 옅어진다.
22명의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에파타 합창단이 창단 26년 만에 처음으로 내놓은 음반 ‘에파타 합창단’(Ephphatha Choir)은 오래도록 처음으로 남을 것 같다. 이 한 장의 음반을 내기까지 상상하기조차 힘든 지난한 시간과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창단 26년 만에 첫 음반을 냈을까.
한국교회 시각장애인 합창단의 첫 음악 앨범으로 기록될 이 음반은 그만큼 많은 이들 기억 속에 오래도록 자리할 게 틀림없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사랑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궁금증이 앞선다. 앞 못 보는 단원들이 어떻게 선곡과 편곡, 녹음에 이르는 험난하기만 한 음반 제작 과정을 마칠 수 있었을까? 단원들의 곁에 지휘자 유인곤(요셉·46)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씨는 비시각장애인이다. 유씨의 간곡한 청으로 에파타 합창단에서 오르간 반주와 지휘를 겸하는 또 한 명의 비시각장애인 이윤정(요세피나)씨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유씨가 지휘봉을 잡기 시작한 것은 합창단 창단 이듬해인 1990년, 한양대 음대 작곡가 재학생 신분이었다. 1991년 여름 “지휘자로 다시 돌아올게요”라는 약속을 남기고 군에 입대한 후 세상 풍파에 시달리다 2009년에야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유씨는 첫 음반 제작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음반 제작을 계기로 단원들이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단결하기 위해서라는 것. 다른 하나는 뜻밖이다. “제가 지휘자 자리에서 쫓겨나기 위해서입니다.” 더불어 음반 제작에 참여한 단원들도 새 단원들에게 ‘세대교체 당하기 위해서’다.
무슨 의미일까? 유씨가 지휘자로서 시종일관 간직한 꿈은 에파타 합창단을 ‘월급 받는 합창단’, ‘공연 수익을 내는 합창단’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에파타 합창단의 명성이 날로 높아져 보다 훌륭한 지휘자가 들어와 자신을 쫓아내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기존 단원들도 에파타 합창단에 자진해서 들어오려는 신진 단원들에게 밀려나기를 바란다.
유씨는 자신과 단원들이 새 물결에 밀려나면 뿌듯한 마음으로 ‘OB(Old Boy) 에파타 합창단’으로 활동할 생각이다. 에파타 합창단의 첫 번째 음반이 과연 유씨의 꿈을 이루는 촉매가 될지 긴 호흡으로 지켜볼 일이다.
음반 ‘에파타 합창단’에는 첫 곡으로 ‘나의 눈을 여소서’를 비롯해 ‘빛으로 나신’(O Nata Lux), ‘착한 예수’(Pie Jesu) 등 9곡이 수록돼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는 시각장애인들이 불러 더욱 가슴을 울리는 곡들이다.
문화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